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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 혼마루(前) 2018. 11. 16. 11:52

※해당 연성은 도검난무의 2차 창작으로, 원작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블랙혼마루 등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설정을 다수 다루고 있습니다.

※과거묘사에 캐릭터 개악/헤이트 창작으로 보일 수 있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폭력 및 고어요소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리지널 사니와가 주인공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번외: 하치스카의 시점

-주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는 주인에게 관심이 많다. 그래서 주인이 우리가 데려온 검들을 겨우 현현시켜놓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망설이는 것도 알아챌 수 있었다. 혼마루의 대들보 역인 헤시키리 하세베를 불러 주인과 새 도검들과의 사이에 대해 말하자 그도 동감해 주었다. 확실히 모노요시 사다무네나 고토 토시로, 니혼고를 대할때 보이지 않는 어색함이 느껴진다고 했다. 주인에게 도움을 받은 몸으로서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최대한 친해질 기회를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일단 목표는 고토 토시로로 정했다. 모노요시 사다무네는 그보다 일찍 와서 이 혼마루에 어느 정도는 적응했고, 니혼고는 하세베랑 티격태격하거나 술을 마시는 걸 보면 딱히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고토 토시로가 자신의 형제들을 보며 혼란스러워 하는것 같아 내린 결정이었다.
그래서 일단 당사자들을 제외하고 토의한 결과 내일의 출진과 원정은 마에다 토시로와 히라노 토시로, 고토 토시로를 제외하기로 했다. 혹시 모르니 기존 도검들 중 하나가 남아서 지켜보는게 좋겠다고 말하자 다들 자기가 남아야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싸움이 날 뻔 했다. 그냥 내일의 근시인 내가 남겠다고 월권을 행사했다.

-그 동안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니혼고가 입을 열었다.
과보호가 아닌가? 아무리 미덥지 않더라도 엄연히 우리들의 주인으로 대해야 할 것을, 극성스러운 부모들 같은 태도로군.
그 말에 카슈 키요미츠가 발끈했다.
우리 주인은 섬세한 아이란 말야!
아이라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군, 하지만 동감이다. 조금만 잘못돼도 자기 몸을 베고 잘라대는 인간을 함부로 다루면 안돼.
오오쿠리카라도 동의하고 있다. 그나저나 이 자리에는 주인에 대한 존경과 경의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군, 이름높은 명검들이 뭘 하는 건지.

-일단 초기 멤버인 카슈 키요미츠와 오오쿠리카라, 츠루마루 쿠니나가가 열심히 니혼고에게 이 혼마루가 어떻게 세워지고 어떤 경위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블랙 혼마루 같은건 들어본 적 없는 니혼고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흔들리는 건 제법 재미있었다.
그 와중에 나를 현현시키기 전에 무서움을 달래려고 자해했다는 이야기가 나와 깜짝 놀랐다. 츠루마루 쿠니나가에게 회초리를 맞은 건 기억나는데 이유가 그것이었다니. 다행히 요즘은 자주 자해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주인에게 내일의 일정을 전달했다. 고개를 끄덕이긴 하는데 역시나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본인도 더 나아지고 싶다고 했으니까 일단은 작은 것부터 시작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

-고토 토시로는 출진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출진부대를 마중나가는 걸 주인이 다음엔 전투에 내보내겠다고 달래고 있었다. 가끔은 주인 노릇을 잘 해내는 것이 믿음직스럽다.
출진부대와 원정부대가 나가고 나면 남는 도검은 몇 없다. 주인은 그 몇 없는 도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한 모양이다. 어색한 침묵을 못 견뎠는지 주인은 갑자기 밤을 구워 먹자고 일어나서는 화로를 가지러 갔다.

-남은 인물 중에 밤을 구울 때는 칼집을 내야 한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 문제다. 반나절이나 걸려 방을 치웠다. 주인의 이마에 난 혹을 볼 때마다 돌아온 도검들이 뭐라고 할지 걱정스럽다.

-마에다 토시로와 히라노 토시로는 어딜 가든 꼭 붙어다닌다. 고토 토시로의 부탁으로 둘이 도장 제작실로 가 도장의 수를 세고 정리하는 동안 방에는 나와 주인, 고토 토시로만 남았다.
우리 꼬마들, 사실은 나한테 말한 것보다 더 힘들었지?
주인이 멈칫했다.
누구한테 들었어?
분위기만 봐도 알아. 그래서, 설마 주인이 괴롭힌건 아니지?
그랬으면 내가 멀쩡하겠냐, 다른 애들이 가만히 안 있는다니까. 여긴 원래 그런 혼마루란 말야. 나부터가 다른 도검들한테 괴롭힘당하다가 왔고, 다른 애들도 거의 그래. 너랑 모노요시, 니혼고는 예외지만.
헤헤.
고토 토시로는 그 말에 딱히 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긴 그럴거 같았어. 주인부터가 굴 안에 있는 겁먹은 너구리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걸. 누구 괴롭힐 거 같진 않긴 해.
고토 토시로, 주인에 대한 예의가 없군.
맞아, 맞아. 주인에 대한 하극상이라고. 좀 더 공경하란 말야.
이때다 싶어 맞장구를 치는 주인이 가끔 한심하긴 하다.

-아무튼 고토 토시로와 주인이 마음을 터놓은 대화를 하는 건 처음이다. 고토 토시로는 자세한 일은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었는지 형제들이 당한 일만으로도 하얗게 질려있었다.
어째서 그런 거야? 그 못된 사니와는.
주인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러게, 어째서일까. 한 번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어째서 이렇게나 많을까.
그렇게 말하더니 시선을 떨궜다.
없었어야 하는 일들인데. 그런 일들이 없었다면 나도 아마...
주인은 거기까지만 말하더니 입을 다물고는 그냥 고토 토시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토는 키도 크고 형이니까, 마에다랑 히라노를 잘 돌봐줄 수 있을거야. 다행이다. 고토가 있어서. 나 혼자서는 무리거든.

-고토 토시로가 나간 동안 주인과 대화했다.
친해졌으면 좋겠는데.
그럴 줄 알았어. 다들 왜 이렇게 쓸데없는 참견을 하는거야. 다들 천천히 친해져 가고 있는 참이란 말야.
니혼고랑 똑같은 말인데, 그거. 니혼고도 주인을 과보호한다고 말했었거든.
다들 알면 자중하란 말야.
그런 걸 하필 우리한테 바라는 거야? 무리지.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다. 더 이상 우리가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만큼 주인도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다 보니 조금 과하게 챙기는 감도 있지만.

-어색함을 달래려면 같이 노는게 제일이라며 주인은 티비에 게임기를 연결했다. 친선도모 게임은 주인이 패드를 집어던지는 걸로 끝났다. 한 번쯤은 접대게임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고토 토시로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나중에 보니 마에다 토시로와 히라노 토시로에게 자랑을 하고 있었다.

-모두들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오자마자 카슈 키요미츠와 츠루마루 쿠니나가가 주인의 이마에 난 혹은 뭐냐고 길길이 뛰는 바람에 진땀을 뺐다.

-저녁식사 시간에 주인의 왼쪽에 앉은 것은 고토 토시로였다. 오른쪽은 비워둔다. 가끔 수저나 젓가락을 놓쳐 음식을 흘린다는 이유로 주인이 비우게 한 것이다. 고토 토시로는 옆에 앉아있는 동생들과 주인에게 반찬을 집어 밥 위에 얹어주는 등 식사시간 내내 분주했다.
그래도 즐거워보이니 다행이다.

-서비스가 계속되는지 이번에는 주인의 방에 들어가선 이불을 펴놓고 있다. 역시나 이건 좀 우스워서 물어보니 주인이 그래도 고마우니 뭐라도 해주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고토 토시로는 자기보다 키가 큰 주인을 아와타구치의 동생 중 하나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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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나무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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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 혼마루(前) 2018. 11. 16. 11:51

※해당 연성은 도검난무의 2차 창작으로, 원작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블랙혼마루 등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설정을 다수 다루고 있습니다.

※과거묘사에 캐릭터 개악/헤이트 창작으로 보일 수 있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폭력 및 고어요소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리지널 사니와가 주인공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연련을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사니와님?
대롱여우의 가벼운 권유에도 나는 고민했다. 우리 혼마루의 남사들은 다른 도검에 대한 트라우마는 적으니까 괜찮을 것이다. 다만 내가 거기 참관해야 한다고 하면 조금 다르다. 아무튼, 시도 자체는 해봐도 좋을지 모르겠다.

-연련을 해보기로 했다는 말에 남사들이 다들 묘한 표정을 지었다.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시시오였다.
다 좋지만, 주인은 아직 겁이 많으니까 무리 안해도 괜찮아.
다른 좋은 말을 두고 하필 겁이 많다니. 한숨이 나오는 걸 참고 있자니 그 말에 우라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옆의 하치스카도 동의하는 기색이었다. 그런 도검들의 생각을 대변하듯 입을 연 것은 언제나처럼 하세베였다.
시시오의 말이 맞습니다. 아직 주군께서는 모든 종류의 도검남사들에 대해 평범하게 대하실 수 없지 않습니까?
하세베는...생각보다도 훨씬 날카롭다. 설득의 말을 한참 골라서 겨우 피하기만 하면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하자 듣고만 있던 츠루마루가 경악하며 제대로 된 소리를 할 수 있었느냐고 또 놀렸다.

-발상은 좋지만, 웬만한 사니와라면 성능이 좋은 대태도 중에서도 뛰어난 능력치를 가진 호타루마루를 거의 최고연도까지 키워 내보낼 거라는 걸 잊었다.
나는, 아마 저렇 게 잘 리고 베여 죽을 뻔하고 아프고 아프고 아파서 아
휘두른다
앞에 카센이 있는데도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나한테 화내도 좋으니까 제발 돌려주세요. 나한테는 뭐든 해도 좋으니까, 팔을 잘라도 좋고 다리를 토막쳐도 좋아요. 눈을 터뜨려버려도 좋고 코를 베어내도 귀를 갈기갈기 찢어도 좋아요. 뱃속에 있는 것도 다 마음대로 하세요, 끄집어내도 되고 잘라도 돼요. 먹고 싶으면 먹어도 돼요, 어떻게 해도 좋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카센을 돌려주세요.

-눈을 뜨자 낯익은 풍경이었다. 카슈가 울며 나를 끌어안고 매달렸다. 연련장에서 기절한 걸 남사들이 데리고 왔다고 한다. 사니와의 참관 없이 연련이 가능한지 나 대신 남사들이 문의를 넣었다고 했다. 카슈를 달래는 대신 가만히 안겨있었다. 나는 분명 그 플래시백을 더듬어 정말로 그리운 얼굴을 잠시나마 봤던 것 같다. 가장 소중하고 그리운 것을 잃을 뻔한 수백번의 상황 중 하나를, 이런 식으로나마 다시 한번 그를 보고 싶었다.

-조금 아쉽다. 당연한 일이지만 남사들 전원이 연련을 거부했다. 역시 사니와가 동석하지 않으면 안되는 모양이었다. 슬쩍 가장 말을 잘 들어줄 것 같이 보이는 아이젠에게 다가가 구슬러보았지만 원정도 출진도 원하는 대로 해주겠지만 그건 안되겠다고 딱 잘라 말하니 나도 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주인이 힘들었다는 건 들었어.
그렇지만.
그러면 할 필요없어!
너 꽤나 단호해졌구나.
주인을 지키기 위해 애염명왕의 가호를 두른 몸이니까, 헤헤.
많이 밝아진 작은 아이를 슬쩍 끌어안고 다독였다. 음...하기 싫다는 일은 억지로 시키면 안되는 거겠지, 역시.

-혼마루의 분위기가 다소 침울해졌다. 역시 나 때문이겠지. 미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있다.
그러던 중 시기적절하다고 해야 할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정부에서 연도가 낮은 도검들의 육성을 위한 기간을 마련했다고 한다. 가장 나중에 혼마루에 와서 아직 연도가 낮은 고토가 눈을 빛내면서 열심히 옆에서 나를 잡아 흔들고 있다.
가자, 가자고 대장! 여기서면 나도 금방 다른 녀석들만큼 연도도 높아질 거고, 어쩌면 키도...
연도가 높아진다고 키가 커지나...뭐, 많이 다치지 않는 지역이라면 괜찮겠지...?
아무튼 그렇게 되어 최근에 혼마루에 오게 된 단도와 와키자시들을 중심으로 부대를 편성해 보냈다. 초반 멤버들이 갈 곳이 없어 심심해하는거 같아 은근히 연련 이야기를 꺼내봤다가 츠루마루에게 야단맞았다. 눈가리개를 하면 참관할 수 있다고 나름 생각한 대로 말해봤지만 참관의 의미가 없지 않느냐는 대답만 돌아왔다.

-다행히 그리 위험한 지역은 아닌거 같다. 부상을 입고 돌아오는 남사도 까진 상처나 날에 살짝 스친 정도가 전부이니까. 그럴때마다 바로바로 수리한 뒤 쉬고 나서야 재출진하게 했다. 다른 사니와들이라면 연도가 낮은 도검들로 여러 부대를 편성해 돌아가며 출진하게 할 테지만 우리 혼마루, 사람이 많이 없으니까.
다만 쉬게 된 도검들이 더 싸울수 있다며 의욕을 내비쳐오는게 문제다. 마에다와 히라노까지도 주군에게 더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고 나서는데 뭐라고 해줘야 할지.

-남사들이 웬 말을 하나 끌고왔다. 저번 오사카성에서 받은 것같이 영 시원찮고 체구도 작은 말이지만 그건 그것대로 귀여운거 같다. 마구간 옆에 만들어둔 작은 울타리 안에 방목하기로 했다.

-현계는 겨울을 맞았다고 하기에 계절을 겨울로 바꿔보았다. 좋은 기억이 없는 계절이지만 기억속에 남은 핏자국투성이의 흰 눈 쌓인 땅 대신 아침 눈당번이 열심히 쓸어낸 자국이 남은 땅과 한쪽으로 쓸어 모아둔 눈더미들이 보이는 것은 나쁘지 않다.
눈더미 옆에는 그럴듯하게 만든 작은 눈사람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오늘 눈당번은 시시오였지. 눈사람을 세어보니까 남사들 숫자보다 한 개가 많다. 몇번이나 다시 세다가 갑자기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키 순서대로 늘어서있는 눈사람 중에, 미카즈키 옆에 있는 특징없이 평범한 눈사람이 누구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츠루마루와 하세베가 눈으로 커다랗게 집을 만들었다. 단도들이 눈집 안으로 들어가 옹기종기 모여 떠들썩하게 놀고 있었다. 마에다랑 히라노는 제법 잘 웃게 됐다. 골목대장같은 고토 덕분일까. 한쪽에서는 오오쿠리카라가 또 쌓인 눈을 쓸어내고 있었다. 처마에 고드름이 한가득 달려있는 것을 보고 미카즈키가 즐거워하며 손을 내밀어 큰 고드름 하나를 꺾어내 입에 가져가는 것을 보고 입에 넣기 직전에 겨우 말렸다.
날이 추우니 방 안에 화로를 놓고 고구마를 구워 다 같이 나눠먹었다.

-출진장소는 샛길이 많아 잠시라도 한눈을 팔다가는 옆길로 새기 일쑤라고 남사들이 한숨을 쉬고 있었다. 굳이 적 대장을 칠 필요까지는 없다고 했더니 카슈가 눈을 빛내면서 우리 혼마루엔 창이 없으니 이참에 삼명창 중 하나라는 니혼고를 꼭 잡아오겠다고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우리 혼마루의 남사들은 새 도검을 얻을 수 있는 기회만 생기면 눈에 불을 켜는거 같다. 모든 도검들이 다 모노요시 같은 케이스라고 생각하는 걸까. 실제로 내가 있던 혼마루는 니혼고가 데이터베이스에 추가되기 전이었으니 니혼고를 실제로 본 적도, 니혼고에게 다친 적도 없긴 하지만.

-그 뒤로는 그럭저럭, 다른 때와 같았다. 어떤 검은 부대장의 손에 들려와 도해실에 놓여 순서대로 도해되고, 어떤 검은 아예 혼마루로 가지고 오지도 않는다. 니혼고를 굳이 가져올 필요는 없다고 말했는데도 다들 너무 열심이다.
돌아오면서 춥다고 투덜거리는 카슈의 코끝이 빨갛다. 다시 계절을 바꿔야 할까 하고 생각했는데 겨울이 신기한지 마냥 눈밭을 뛰어노는 우라시마를 보고 잠시만 더 눈과 얼음을 즐기기로 했다.

-눈이 그치지 않고 내리는 늦은 오후, 남사들이 돌아왔다. 커다란 털이 달린 막대기로 눈을 치우면서. 그게 창이란 건 남사들 모두가 안에 들어온 뒤에야 알았다. 어떻게든 니혼고를 구해온 집념이 고맙고 대단하다.
니혼고는 현현시키자마자 정삼품을 가지고 눈이나 치우는 바보들이 있을 줄은 몰랐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니혼고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술을 좋아하진 않는다. 술을 마시고 좋은 꼴을 본 적이 있어야지. 그래서 가끔 남사들이 저녁에 같이 마시자고 찾아올 때도 이야기에 맞장구 쳐주며 한두잔, 나머지는 언제나 안주로 때우고 있었기에 찾아오는 남사들은 대부분 안주거리를 잔뜩 챙겨오곤 했었다.
대작상대가 되어줄 만한 다른 남사들이 있다는 게 다행이다. 아무튼 내가 술을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떠나서 언제나처럼 신참을 반기기 위해 주기적으로 신청하는 필요물품에 술을 종류별로 신청해보았다.

-의외로 우리 혼마루의 주당은 단도들이었다. 특히 아이젠의 주량이 놀라웠다. 역시 축제에선 술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런걸까.
손사래를 치며 연신 잔을 거절하는 시시오에게 물어보니 주사가 걱정돼서 그렇다며 멋적게 웃었다. 뭘 걱정하는지 알 거 같아서 대신 쥬스캔을 갖다 쥐어주었다. 니혼고의 옆에서는 고토와 츠루마루가 신나게 잔을 들이키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이미 뻗어버린 오오쿠리카라가 누워있고 그 옆에선 카슈가 오오쿠리카라의 배를 베고 누워있었다. 강 밑의 아이라고 그런것도 잘 안다고 말한 녀석이 몇 잔이나 마셨다고.
조심스레 자리를 피하려다가 츠루마루에게 붙들렸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과도한 음주를 삼가라고 하세베에게 꾸중을 들었다. 옆에서는 마에다가 츠루마루에게  주군에게 술을 너무 많이 권하면 안된다고 타이르고 있었다.
둘만 남았을때 츠루마루를 노려보자 장난스럽게 웃으며 너는 원래 술이라도 먹여야 덜 갑갑해지는 타입이라며 얼버무렸다. 대체 내가 술을 마시면 무슨 소리를 하길래. 숙취에 시달리고 있으니 미카즈키가 잔이 세 개 놓인 쟁반을 가져와 나와 츠루마루에게 따뜻한 꿀물을 건넸다. 왜 세 개지, 하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미카즈키가 남은 잔을 집어들고는 달고 따뜻해서 좋구나. 라고 웃으며 꿀물을 호록거렸다.

-오늘 밭일 당번인 하치스카가 숙취로 누워있다기에 대신 니혼고를 당번으로 세웠다. 나중에 일어나면 코테츠 진품의 품위는 어디갔냐고 놀려야지. 정작 우라시마는 팔팔하구만.
니혼고가 적재적소라는 말을 모르느냐고 약간 어이없어하길래 정삼품에 삼명창정도 되면 밭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겠느냐고 대답해보았다. 영 비리비리한 주인이 말은 그나마 조금 한다면서 니혼고는 큰 손으로 내 머리를 세게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이 마구 흐트러졌다.
과연 삼명창이라는 이름이 안 아깝게 일도 잘한다고 말했더니 술병을 기울이던 니혼고는 영 복잡한 표정으로 애매하게 웃어보였다.

-다른 삼명창들은 없냐길래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재생속도보다 빠르게 찔러대던 오테기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나, 아니면 톤보키리에게 당했던 말로 하기 좀 힘든 이야기를 해야 되나. 좀 있다가 데려올 테니까 그동안 우리 혼마루의 이름높은 창으로 있어달라고만 말했다. 뭐, 언젠가는 어떻게든...데려오지 않을까.

-하세베랑 니혼고는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다. 일단 니혼고한테 하세베를 부러뜨리면 안된다고 말해두는 게 좋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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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나무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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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재활용 혼마루(前) 2018. 11. 16. 11:48

※해당 연성은 도검난무의 2차 창작으로, 원작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블랙혼마루 등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설정을 다수 다루고 있습니다.

※과거묘사에 캐릭터 개악/헤이트 창작으로 보일 수 있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폭력 및 고어요소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리지널 사니와가 주인공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이다. 남사들이 이번에도 정부 공문을 가져다 읽더니 부대를 꾸리기 시작했다. 눈을 비비면서 정말 그거 할 거냐고 물어보자 카슈가 살짝 시선을 돌리며 저번에 금화를 다 썼거든...하고 중얼거렸다. 음, 확실히 어쩌면 필요해질 때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없어도 곤란하기는 하지만. 옆에서 모노요시가 기대감과 호기심이 가득한 밝은 얼굴로 말했다.
저 때문에 많이 고생하신거 같으니까, 저도 같이 출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주인님을 위해서 금화를 가득 가져올께요!
아니, 아직 연도 낮으니까 무리는 하지 말고. 도장은? 잘 챙겼어? 아...특상 도장이 부족하니까. 많이 만들어둬야지. 일단 이걸로 참아줘. 그리고 다들, 한명이라도 도장이 모두 부서지면 돌아와야 돼. 알았지?
다들 도장은 잘 챙겼는지 확인한 뒤에 오사카성에 보냈다. 초반엔 어렵지 않아 연도가 낮은 남사들이 단련하기 좋다고 하니까 뭐, 괜찮겠지.

-근시인 마에다가 지나가듯 말했다.
제 형제 중에는 재화 축적에 능한 아이가 있지요. 이럴때 주군의 곁에 있다면 도움이 될 텐데.
하카타 토시로 말이지? 음...그렇지만 지금은 얻을 수 없을 텐데.
그렇게 말하자 마에다는 있다면 좋겠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납득해 주었다. 어디선가 데려올수 있으려냐 하고 고민하고 있으니 꼭 훔쳐듣다가 타이밍이라도 재서 나타나는 것처럼 츠루마루가 들어와서는 공문을 내밀었다. 고토 토시로에 대한 공문에 이어 지금이라면 단도로 하카타를 얻을수 있다는 통지였다. 츠루마루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제법 많이 나아졌으니, 단도실을 열어도 좋지 않겠나?
나는 대답 대신 츠루마루를 슬쩍 노려봐주었다. 어쩐지 공문을 읽고 가장 신나보이는 눈치더라니, 미련을 참 못 떨치는 성격이다. 고개를 저어보이자 츠루마루는 한숨을 쉬었다.
단도도 사니와의 소양이자 할 일이 아니냐고 묻고 싶은 참이다만.
기각. 절대 안열어!
의지박약인 주제에 고집만 센 녀석 같으니라고.
누가 할 소린데, 고집불통 영감탱이.
정수리에 꿀밤이 떨어졌다.

-단도실을 열지 않고 츠루마루의 요구를 들어주는 법이 있긴 하다. 혼마루에 '두 번째' 카센을 데려오면 된다. 하지만 저 바보는 왜 그게 안되는지까지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카센을 다시 만났을 때 손에 든 모든 것을 내던지고 두 손으로 카센을 끌어안을 게 분명하다. 내던져지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그리고 나는 내던지고 싶지도 않다고.
단도로 어떤 검이 나올지는 모른다. 자원의 양을 조절하면 어느 정도로는 만나고 싶지 않은 도검을 피할 수도 있을 테지만, 확률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아직 약한 나는 누군가를 만나 마음을 깎일지도 모르고, 의지를 잃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싫다. 못박은 나무판은 그래서 절대로 뜯어내서는 안된다.

-요즘은 리스트를 받는 주기가 길어지고 있다. 바깥에서는 블랙혼마루 발각 빈도가 낮아지는 모양이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일정 연도에 이른 도검들을 강화시켰다. 연련은 도해보다는 정신을 덜 소모시킨다. 히라노와 아이젠을 강화시켰다. 모노요시가 부러운 표정을 짓고 있길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으니까 앞으로 조금만 더 하면 괜찮다고 격려를 시도해보았다. 이렇게 말하면 되는 거겠지. 자신은 없지만. 모노요시는 나를 유독 잘 따른다. 처음부터 나를 잘 따르고 호의적이던 도검이 많지는 않아서 얼떨떨하다. 다른 애들처럼 잘 해주면 될까.

-카슈가 특상 투석병을 깨뜨렸다고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런걸로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울적해하는 카슈한테 새 도장을 쥐어주어도 기분이 바로 풀린거 같지 않길래 비장의 무기를 꺼내보았다. 비싸서 몇개 못사줬던 폴리쉬였다. 살짝 얼굴이 펴는가 싶더니 발라달라고 기대왔다. 갑자기 웬 애교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카슈를 앉혀놓고 손을 보았다. 싸우는 도중에 까진 네일이 보였다. 아세톤을 묻힌 화장솜으로 지워내는 동안 카슈가 슬쩍 입을 열었다. 시선은 다른 쪽으로 향한 채로.
나, 아직도 여기서 제일 귀여워?
무슨 소리를, 당연한 거잖아.
즉답이 튀어나왔다. 본심은 원래 말을 꾸며내는 것보다 빠르게 튀어나온다. 그걸 아는지 카슈는 웃었다.
모노요시보다?
카슈보다 늦게 들어온 애한테 질투하면 안돼, 그리고 카슈는 명예 초기도니까.
네일은 오늘따라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여기저기 튀어나왔지만 그대로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지하 100층까지 탐색하고 나면 정부에서 소소한 선물을 준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긴 물건이라고 하네요.
와...정말 별로 안 갖고 싶게 생겼다.
나는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도 남사들은 이왕 50층까지 내려가는거 100층까지 못갈 것도 없지 않느냐고 들떠서는 자기들끼리 떠들어대고 있었다. 어떻게 말려볼까 고민하다가 그 때부터는 적이 강해진다고 하니 너희도 다쳐 돌아올게 뻔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피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하자 남사들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있었다. 토론이 어떻게 끝날지는 뻔한 일이어서 나는 그냥 서류정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은 더 뻔뻔해져서, 내 민감한 부분을 가지고 마음을 살짝 흔드는 데까지는 문제없이 할 수 있었다. 고민이 끝났는지 미카즈키가 시원스러운 얼굴로 그러면 그만두도록 하자꾸나. 라며 웃었다. 생각대로였다. 아, 그 현수막이 갖고 싶지 않은 것도 진심이다.

-고토 토시로를 입수하는 건 모노요시 때보다는 훨씬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단도 치고는 약간 키가 큰, 활발하고 솔직한 아이였다. 마에다와 히라노를 보고 환하게 웃으면서 다가가더니 형제들을 꼭 안고 등을 팡팡 두드려주는 것이 귀여웠다. 신참에 속하는 고토와 모노요시에게 혼마루에서 지낼때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주는 일은 카슈와 츠루마루가 맡기로 했다. 마에다와 히라노의 표정은 크게 밝아지지는 않았다. 나중에 슬쩍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불합리하고, 음습하고 어두운 감정이다. 인간이 한가득 가지고 있는 감정을 신이 가지지 못할 리도 없는 일이고, 인간의 감정이 옮겨붙은 사물의 신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마에다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울적한 얼굴로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었다. 히라노가 그런 마에다를 달래면서도 내 눈치를 보길래 나는 너희를 비난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왜 나만 괴로웠는지, 왜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했는지 같은 감정은 누구라도 가질 수 있다고. 그러니까 같이 입을 다물고 없애나가자고 말했다. 마에다는 고토의 웃는 얼굴을, 아직 마주 웃으며 대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같은 도파의 검을 이런 식으로 데려와서 둔 적이 없었기에 나는 고토에게 얼마만큼의 주의사항을 줘야 할지 고민했다.

-너무 쓰면 물을 타면 그만이다. 그걸 나보다 더 잘 아는 카슈랑 츠루마루가 적당히 고토에게 에둘러 설명한 모양이었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내 동생들을 괴롭히는 놈들은 가만히 둘 수 없다고 화내는 고토를 보고 나는 왠지 마에다와 히라노가 부러워졌다. 다만 너무 화내지 않아줬으면 했다. 여기에는 타인의 격한 감정에 평범하게 반응할 수 있는 녀석들보단 그렇지 않은 녀석들이 많았으니까.뜻밖에 다행스럽게도 그런 고토의 고삐 역할을 해준 것이 모노요시였다. 아는 사이였는지 친하게 다니던 둘이었는데, 고토가 조금씩 얌전해지는 걸 보면 그나마 조금은 더 먼저 이 혼마루에 와서 익숙해진 모노요시가 고토가 실수하지 않게 보살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종류의 행운이었나...! 조금 감탄했다. 그리고 옛날의 내 생각을 정정했다. 비뚤어지지 않은 애들이라도, 여기 와서 제대로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곳도, 이곳을 이루고 있는 모두도 이제 그렇게까지 이상한 건 아닐 거다.

-아이젠이 츠루마루랑 같이 장난을 치다가 하세베에게 혼났다. 뭔지 몰라도 축제 비스무레한 걸 하고 싶었던 모양이라 하세베에게 너무 화내지 말라고 슬쩍 찔렀다.

-하하하, 마음에 달린 일이니라.
마음?
그러하지. 내가 왔을 때도 이 혼마루는 나보다 훨씬 밝은 곳이었다만, 지금은 그보다 조금 더 밝아져 있으니.
그렇게 봐주면야 다행이지만.
이 혼마루에 상당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느냐? 솔직하지 못한 아이도 귀엽기는 하지만, 알기는 어렵구나.
천하오검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어르신은 그냥 단 거라도 먹여서 입을 못 열게 해두는게 좋지 않을까. 가끔 예리하다.

-사랑받아도 될까, 사랑받을 자격이 있을까. 그런 것과는 별개로 누구든, 언제든 사랑받고 싶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거기서 예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 것은 알고 있으니까, 사랑받지 못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원래 밝은 성격을 가진 남사들이 모여서 떠들썩하게 노는 것을 부러운 듯 보던 마에다와 히라노가 어느새 고토에게 끌려서 같이 놀이를 하는 것을 봤다. 공을 가지고 싶대서 전에 주문했더니 신나게 차고 놀고 있었다. 나는 옛날부터 운동신경이 별로였으니 남사들 사이에 끼어 놀다가는 분명 좋은 꼴은 못볼거 같아서 마루에 앉아 심판을 해주기로 했다.요즘은 우라시마가 저기 끼여서 심심해졌다고 말하며 하치스카가 차랑 과자를 담은 쟁반을 가져와 옆에 놓고 앉았다. 같이 차를 마셨다. 문득 궁금한 것이 떠올라 물었다. 나가소네를 정말로 좋은 형으로 생각하고 있느냐고. 하치스카는 약간 씁쓸하게 웃으며 원래의 나라면 분명, 그렇게 말하지 않을 거라는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코테츠의 이름을 사칭하는 위작일 뿐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게 당연하지만, 자신이 전 주인에게 고통받고 있을 때 끝까지 구해주려 했던 것 또한 나가소네이고 그것은 형제애가 동반되어 있었을 거라고 말하면서 하치스카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것까지는 부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아마 나가소네가 온다면 형도 뭣도 아니라고, 의례적인 말은 해버릴지도.
그렇게 농담처럼 말하는 하치스카를 보고 머쓱해하던 내게 시시오가 달려와서 지금 몇점이었냐고 묻다가 제대로 심판도 안보고 뭐했느냐고 나를 혼냈다.
누구나 어떤 방법으로든 조금씩 나아져간다.

-간만에 꺼내본 큰 커터칼이 녹슬어 있었다. 새것을 주문할까 하다가 조금 고민했다. 필요없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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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나무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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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재활용 혼마루(前) 2018. 11. 16. 11:46

※해당 연성은 도검난무의 2차 창작으로, 원작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블랙혼마루 등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설정을 다수 다루고 있습니다.

※과거묘사에 캐릭터 개악/헤이트 창작으로 보일 수 있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폭력 및 고어요소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리지널 사니와가 주인공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싫어하는 말: 죄책감, 부채, 짐. 누가 나를 위해 그걸 짊어지는 것이 싫다. 하지만 그 누군가는 나를 좋아하고 내게 미안하기에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일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라면 그 누군가도 내가 짊어지는 것을 싫어하겠지만, 나 역시도 그것을 내려놓지 못한다.
그것이 지금처럼 하지 않는다와 하지 못한다의 차이로 드러난다. 기껏 모두가 데려다주었는데. 왜 모노요시 사다무네를 현현시키지 않는지 의아해하는 도검들에게는 대충 변명했다.

-혼자 가만히 좌대에 놓인 검을 바라보다가 결국 정기보고서에 사실대로 서술했다. 얼마 뒤에 담당자의 소견과 상부의 견해가 돌아왔다. 도검의 입수와 현현은 각 사니와의 재량이니 관여하지 않는다는 입장과, 담당자의 개인적인 메일이 하나씩.

-'내가 볼 때는 그냥 그거 같아요. 전에 코우쨩이 처음으로 현현시킨 건 카센이었죠. 당신의 손에 들어와 현현시키기 전까지는 자고 있던 도검. 직접 현현시킨 도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크게 좌우할 걸요. 물론 영력이나 컨트롤이 망가진 탓도 있지만, 본래 이쪽 분야에 정신적인 상태가 크게 작용하는 건 알테고. 신경쓰이면 마침 신입 사니와들 연수 있는데 재교육이나 받아볼래요?'
그럴 생각은 없지만 저 말은 맞는 말일지도. 유일하게 내가 직접 얻은 도검을 내가 직접 불러내어 지옥으로 빠뜨린 거라는 마음은 언제나 가지고 있었다. 그 생각이 모노요시 사다무네에게도 무의식중에 적용될 줄은 몰랐는데.

-모노요시 사다무네를 현현시키려고 시도하다가 카슈에게 들켰다. 어리둥절하는 사이 카슈가 놀란 얼굴로 뛰쳐나갔다. 이유는 여전히 모르는 채로 곧 들이닥친 하세베와 오오쿠리카라에게 끌려서 혼마루 도검회의에 강제소집됐다.

-도검을 현현시키는 것이 사니와의 기본 소양이 아니었나.
그렇습니다만...
그러면 그것도 못하게 됐다면, 주인이 더 이상 이 혼마루에 못 있거나 그러는거 아니야?
아니, 그건...
주인이 떠나는거 나는 싫은데!
잠깐만, 저기...
혹시, 그래서 지금껏 저희에게 얼버무리고 계셨던 건...
이런, 큰일이구나. 혹시 사니와가 떠나는 건 아니냐...
걱정하지 마, 할아버지! 우리가 못 떠나게 막아주면 되잖아!
다들 그러지 말고 내 말도 좀 들어주면 안돼...?

-이야기를 다 듣고 한심하다는 듯 츠루마루가 고개를 저었다. 기껏 어렵게 꺼낸 이야기였는데.
전부터 남은 미련이나 애석함으로 여기고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그게 이제 발목까지 잡는구나, 바보같은 녀석.
그러고 보면 츠루마루는 전부터 내 미적지근한 태도를 싫어했었다. 츠루마루가 일어나 나가버린 뒤 쟤 왜 저러지 하는 눈빛으로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오오쿠리카라가 자신의 본체를 내게 내밀었다. 혹시 모르니 자신을 되돌렸다 다시 현현해보라는 말에 나는 머뭇거렸다. 안되면 어떻게 하지. 결국 오오쿠리카라를 본체로 되돌렸다. 손안에 쥔 검에 영력을 불어넣자 다시 천천히 빛무리가 모여들어서는 인간의 형체를 만들어냈다. 딱히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오오쿠리카라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그러면 우리들을 현현시키는 데는 확실히 무리가 없다는 뜻이군, 하고만 말했다. 무서워서 확인 못했는데 덕분에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혼마루에 있는 도검들은 자유롭게 현현시킬 수 있다. 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상태 그대로라면 잃을 것도 없다. 나는 그저 마음을 꼭 잡고, 흔들리지 않게 부여잡고서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 된다. 또 누군가를 곁에 두더라도 이제는 잃지 않을 수 있다. 나 때문에 고통받지 않을 수 있다. 모두가 나를 위해 데려왔으니까.

-츠루마루 공에게 들었습니다. 주군께서는 가장 처음 만난 이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엑, 왜 남의 사생활을...그건 그런데, 왜?
그건...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중한 사람은 언제나 그리운 거라고 형님이 가르쳐줬었거든요.
어린...아, 아니지. 너희가 나보다 훨씬 나이는 많지만 어린아이 모습이다 보니 이런 무거운 이야기는 좀 안맞는 듯도 하지만. 그러니까 어...음. 위로해주는 거야?
아니요.
은근히 가차없구나.
형님은 이별이 슬프더라도, 영원히 함께일 수는 없다고도 하셨습니다.
그것도 또 맞는 말이지. 그런데 그 이치고 히토후리가 그런 말을 다.
형님이 부러지기 직전에 저희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
그냥, 주군께도 들려드리고 싶어서.
......고마워.

-또 아프지 않은 꿈을 꿨다. 언제나 같은 나무 밑. 벚나무 아래에 한가득 모란꽃잎이 떨어져 있다. 듬성듬성해진 가지 너머로는 선명하게 초승달이 보인다. 가만히 여러종류의 꽃에 둘러싸인채 앉아있다 보니 하얀 옷을 입은 소년이 다가왔다. 웃으면서 손에 든 것을 건넨다. 조그만 네잎클로버였다. 당신에게도 행운이 따랐으면 좋겠어요, 라고 맑은 목소리로 말하며 소년이 웃는다. 너무 알기 쉬운거 아니냐고 꿈속에서도 웃어버렸다.


-22xx년 xx월 xx일자 보고 확인.
도검 및 사니와의 상태: 이상없음. 히라노 토시로와 마에다 토시로의 정신오염도 하락 확인. 해당 도검 위험도 현재 D급.
특이사항: 모노요시 사다무네의 입수.
관찰자 견해: 문제없음. 너무 문제없어서 재미가 없음.
[일지에는 잡담을 쓰지 말라고 또 혼났습니다. 하지만 무심코 써버리게 됩니다. 극적인 재미가 없으니, 아쉬운걸요.]

-22xx년 xx월 xx일자 보고 확인
도검 및 사니와의 상태: 이상없음. 모노요시 사다무네는 미현현 상태.
특이사항: 사니와의 이상 보고. 도검 현현에 문제를 겪고 있음.
관찰자 견해: 정신적 트라우마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임. 큰 문제는 없으나 만약을 기해 관련 프로그램을 소개후 이수할 것을 권함.
[다소 영력이 불안정해진 부분이 있는 것도 원인중 하나로 보이니 잠시 검사를 받을 것도 권유해볼까요. 그나저나 겨우 도검 하나 잃은 건데 그렇데 힘든 걸까요? 다시 카센 카네사다를 만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블랙 혼마루에서 입수된 카센 카네사다 리스트도 쭉 뽑아놓았는데 본인이 거부하면 억지로 맡길 수도 없으니 뭐, 어쩔수 없죠.]

-22xx년 xx월 xx일자 방문결과 기록
동반도검: 츠루마루 쿠니나가
방문목적: 영력측정 및 영력 안정화 프로그램 이수
특이사항: 없음.
관찰자 견해: 정기적으로 방문 후 프로그램 이수 권장. 경우에 따라 심리치료 요함.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제가 싫은 모양입니다. 코우쨩도 절 싫어하기야 마찬가지니까, 도검이랑 사니와는 닮는 걸까요? 여기서는 얌전히 제대로 일만 했는데도 미움받네요, 뭐, 딱히 호감살 필요는 없습니다만. 다른 도검의 인수는 영력 안정화 프로그램 수료 뒤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조금 수라장이 보고 싶긴 하지만 일에 사감은 넣으면 안되죠. 아쉽지만.]

-22xx년 xx월 xx일자 보고 확인.
도검 및 사니와의 상태: 이상없음. 사니와의 프로그램 수료 확인.
특이사항: 사니와의 영력불균형 상태가 다소 개선됨.
관찰자 견해: 지금은 딱히 필요한 부분은 아니라고 보지만, 정화능력이 조금 향상된 것을 확인. 치유력의 변화에 대해서는 직접 발동 확인을 본 뒤에 알 수 있을것 같음.
[확인해보고 싶은데. 그러고 보니 요즘 꽤 멀쩡히 지내고 있지 않나요? 손목이라도 그어주면 관찰이 쉬울텐데.]

-22xx년 xx월 xx일자 보고 확인
이상 없음. 모노요시 사다무네 현현 확인.


-각자 한마디씩?
관심없다. 그보다 그 녀석...너와는 잘 지내는가.
에? 왜 내가 처음이 아냐? 이런건 나한테 가장 먼저 물어봐야지! 아무튼. 조금 부럽기도 하지만 괜찮아. 주인을 가장 처음 만난건 나니까. 그보다 괜찮아? 모노요시랑 제대로 대화하고 있어? 그 애 불안해한단 말야.
와키자시 친구가 생겼어! 왠지 죽이 잘 맞을거 같은걸. 아, 주인을 많이 신경쓰더라고. 그러니까 좀 상냥하게 해줘!
흰색인게 이제 나뿐이 아니군...하하하. 좋은 아이니까, 네게도 분명 행운이 오겠지.
하하하하. 아이들은 그렇게 밝고 활발한게 좋지. 그러니까 너도 조금 웃고 다니면 어떻겠느냐.
너무...시끄러워서 놀랐지만, 그런거 좋아. 나중에 같이 놀고 싶어.
아직 주군께서는 모노요시 사다무네와 친해지지 못하신거 같으니 걱정입니다. 하긴, 원래 그런 분이시지만.
저희는 아직...이 혼마루도, 주군도 낯설지만./그래도 주군에게는 고마운 마음이니까.../정말로 그 분이 행운을 가져오면 좋겠어요.
나 참~그렇게 열심히 데려왔는데 보람이 없나. 아. 그래도 괜찮아! 나중엔 다 친해질테니까.
주인은...낯가림이 심하긴 하지. 이해하지만. 그러니까 서두르지 않도 괜찮아.

-떠들썩하다. 어느새 식구는 늘어났고, 거기에 내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를 하나가 늘었다. 웃으며 인사하는 하얀 도검에게 뭐라고 대답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제대로 웃었던가? 남사들의 말대로 확실히 무섭지는 않았다. 만난 적이 없으니 안 좋은 기억도 없다. 하얀 백지같은 아이에게 나는 분명 얼룩일 텐데. 정말로 모르겠다. 어떻게 닿으면 더럽히지 않을 수 있을까. 이번에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다른 도검들과 모노요시는 잘 지내는 모양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직 연도가 낮은 모노요시가 똑같이 연도가 낮은 다른 단도들이랑 같이 비교적 안전한 지역에 출진하고 연도를 올리고 있다고 하세베가 보고해줬다. 하세베랑 같이 가서 도장의 수를 체크해서 필요한 만큼 새로 만들어넣었다.

-모노요시에게 혹시 모르니 시시오에게 말을 걸때는 등 뒤나 시야 밖에서는 말을 걸지 말라고 당부해두었다. 그 외 주의할 것이 몇개인가 있기에 추가해서 말해두었다. 모노요시는 갸웃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는 당부해둘 것이 적었다는게 의외였다. 다들 나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구나. 나는 아직 한가득 남아있는데.

-모노요시가 단도실에 대해 물어보았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여기에는 큰 필요가 없는 시설이라고 말했다. 현현된지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지식은 있는지 검을 단도하지 않는다는 말에 의아해하는 모습이었다.

-카슈가 모노요시를 데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 같이 놀려는 걸까, 많이 친해졌나 보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가 아직 모노요시에게 살갑게 굴지 못하더라도 다들 도와주겠지. 언제나 고맙다.

-주인님께도 분명 이제부터는 행운이 한가득 찾아올 거에요. 제가 행운을 꼭 가져올 테니까요!
내 손을 꼭 쥐며 그렇게 말하는 모노요시에게 나는 웃으려고 노력했다. 고맙다는 진심은 무엇으로 보여야 다 보일수 있을까. 나를 걱정해 모노요시에게 살짝 언질을 넣는 카슈에게도,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고 걱정해주는 모노요시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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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연성은 도검난무의 2차 창작으로, 원작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블랙혼마루 등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설정을 다수 다루고 있습니다.

※과거묘사에 캐릭터 개악/헤이트 창작으로 보일 수 있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폭력 및 고어요소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리지널 사니와가 주인공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1)

-주인이 그 전에 있던 곳에선, 얼마나 오래 있었지?
그 질문에 나는 살짝 고민하다가 그냥 6년이라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츠루마루가 인상을 썼다.
그런 곳에서?
그 질문에 나는 그냥 담담히 대답했다.
너희도 사니와가 치유해주는 이상 부서지지 못했잖아. 그냥 나도 그거뿐이야.
그렇게 말하며 그 6년간의 흔적을 더듬었다.

-23세. 세상에 내던져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때 이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보수도 좋고, 자격도 되는 일이라고. 그보다 좋았던건 누군가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곁에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인간이 아닌 무엇인가라도 있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쪽이 좋았다. 그렇게 나는 스카웃에 응해 사니와가 되었고 혼마루에 발령나기 전에 초기도를 고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전임자가 있던 혼마루이고, 그 혼마루에 없는 검을 가져가는 것이 좋을 거라는 추천에 카센 카네사다를 고르게 되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모르겠다. 아무튼, 온화했다. 그와 함께라는 게 믿음직할 정도로.

-그리고 카센과 함께 게이트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카센과 떨어졌다. 낯선 수많은 사람들의 손에 잡혀 카센이 나와 떨어져 어디론가 끌려가버리고, 혼자 남은 내 앞에는 검은 정장에 안대를 한 남자가 서있었다.
또 인간이로구나.
듣기 좋은 낮고 다정한 어조의 목소리로 그는 내게 말했었다.
네게 원한은 없지만, 우리에게도 사정이 있어서 말이지. 아무튼 만나서 반가워. 사니와 군. 화풀이용 인형에게 사니와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몇개인가의 호의를 받고 그 몇백배의 악의를 받는다. 추운 겨울이 떠나지 않는 혼마루에서 몇번이고 그 추위와 재액 낀 땅위로 피를 쏟는다. 그래도 나는 본채를 끊임없이 드나들고 단도실을 헤집고 부엌을 기웃거렸다. 어딘가에 있을 나의 초기도를 찾아다녔다. 그때쯤 영력에 이상이 생겼다. 나름 남들보다 우수했던 영력이 자동적으로 자기치유를 가장 우선시해서 사용된다. 정화해야 할 것들을 앞에 두고 깊이 베인 상처가 자동으로 치유되고 절단된 손가락이 재생되게 된다. 살아남는 데만 좋았다. 그렇게 겨우겨우 조금씩, 재액 부스러기를 떨쳐내는 정도로만 매일 조금씩 혼마루를 정화하며 나는 카센을 찾았다.

-카센을 찾은 것은 3년이 지나서였다. 본채 한구석에 있던 빈방. 여러 남사들의 결계와 주박, 밧줄과 족쇄, 눈가리개등으로 손끝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재액에 둘러싸인 카센. 그럼에도 3년전에 잠시 같이 있었을 뿐인 내 목소리에 카센은 웃는다. 매화가 먼 길을 날아가는 것과 같이 너도 내 곁을 찾아주는구나. 그 동안 잘 지냈니? 고통같은건 모르는 척 마냥 평온하게 시를 읊는 듯한 목소리로. 나는 그 목소리에 혼마루에 와서 처음으로 울었다.

-결계를 풀 힘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신 매일 그 방으로 몰래 카센을 찾았다. 그 방으로 가는 길의 모든 것을 조금씩 정화해가며, 다른 도검들의 눈에 띄어 그 소위 '화풀이' 를 당하고서 도망쳐 카센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회복한 뒤 카센을 찾아간다. 재액덩어리가 된 카센을 겨우 조금씩 정화하면서 오늘도 무사히 잘 지냈다고만 이야기한다. 눈이 가려져도 알 수 있는 거짓말을 그저 묵묵히 들어주는 카센과. 그 거짓말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나.

-카센을 구해낸 것은 그것을 2년정도 반복한 뒤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두꺼운 결계에 갑옷도 뚫는다는 단도를 틀어박아 틈을 만들고 결계를 깨게 도와준 것은 아츠시 토시로였다. 그 이유는 한참 뒤에 알았다. 카센이 뒤집어쓴 수많은 재액이 다른 도검들에게 씌어있었던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화풀잇감이었던 것처럼 카센은 나가시비나였다.

-재액을 다 떨쳐내지 못한 카센을 데리고 다니며 나도 점점 그 재액이 달라붙는 것을 느꼈다.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도검들의 공격은 이제 카센에게까지 향했고 연도가 낮은 카센이 부서지는 것만은 막기 위해 몇번이고 몸을 던져 막고, 몰래 카센을 하코다테에 보내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연도를 올리면 부서지는 것만은 피할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매일 모두와 싸우며 또 1년을 보냈다.눌러 베는 것만으로 선반과 함께 사람까지 베어버린다는 그 명도가 카센에게 내리꽂히던 그 날까지.

-......

-아츠시가 영 개운하지 않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뜨고 나서 나는 카센에게 묶여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풀어헤쳤다. 도검남사의 영력이 깃든 밧줄에 손이 닿을 때마다 손바닥이 타들어간다. 상관없었다. 최대한 손에 영력을 둘러 밧줄을 풀어내렸다. 손이 떨려서 몇번이나 밧줄을 놓친다. 그제서야 기억난 조그만 커터칼로 밧줄을 정신없이 끊었다. 조각난 밧줄이 땅으로, 핏방울과 함께 떨어졌다. 겨우 팔을 자유롭게 하고 나서야 눈을 가리고 있는 검은 눈가리개를 풀었다. 그러고 나서야 갑자기 밝아지면 눈에 무리가 클지도 모른다는게 생각나 한 손으로 대신 카센의 눈을 가렸다. 아차. 다친 손이었다. 카센은 가만히 있다가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힘겹게 들어올려 나를 안았다. 듣기 좋던 부드러운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손을 치워주지 않겠니, 네 얼굴을 보고 싶구나.
지금은 안돼, 그보다 다친곳은,
다친 곳이라면 내 눈꺼풀에 닿아 있는 상처 하나를 알고 있단다. 어쩌다 이렇게 다쳤니.
그 정도는 금방 낫는데도, 그 상처 하나가 그저 안타깝다는 듯이 카센은 손 위로 손을 겹치며 말했다.

-여전히 황량한 곳이구나, 흐르는 계절을 즐길 수도 없이.
별채에 돌아오고 겨우 어느정도 회복시킨 뒤에야 카센은 바깥을 내다보며 말했다. 아직 카센의 몸상태는 만전이 아니다. 상처는 모두 치유했지만 재액의 정화는 내 특기가 더이상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남사들이 액받이로 사용해 털어낸 수많은 재액을 뒤집어쓴 채로 카센은 아무렇지 않다는듯 웃었다.
하긴, 풍류를 즐기기에는 나 또한 말도 안되는 몰골이지만.
미안해, 카센.
네가 정화해주지 않았다면 타타리가미가 되는 것도 촌각이었는데, 무엇을 미안해하는지 원. 괜찮단다. 책망은 그만두지 않겠니.

-나는 노사다의 한자루 검, 카센 카네사다라 하는 자. 주인의 곁에서 피안까지 함께할 테니 곁에 두어주렴.
그 말이 너무나 무겁고 기뻤다.

-원래도 내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유일하게 잠시 손에 있었던, 곁에 있었던 카센과 헤어지고 다시 아무것도 없이 보냈다. 나에게는 정말로 카센밖에 없었다. 그것을 숨겼어야 했지만 내게는 그럴 여유도 배려심도 없었을 것이다. 언동 하나하나에 그 마음은 배어나오고 카센을 헤매게 만들었겠지. 내게 향하는 상냥함에 매달려, 카센을 정으로 묶어버린 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카센을 마음에 담았을 것이다. 유일하게 나를 위해준 가족과도 같고, 친구와도 같은 내가 가장 사랑하던 상대.

-이름은 함부로 가르쳐주는 게 아니란다. 원, 어찌 이리도 경계심이 없는지.
왜냐고 되묻는 나에게 카센이 카미카쿠시가 뭔지 가르쳐주었다. 사실 별 문제 없지 않나 하고 긴장감없이 생각했다. 상대가 카센인데 무슨 문제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자 카센은 웃었다.
바보같은 소리를 하지 말거라. 아직도 재액에 오염된 내가 너를 데려간들 타타리가미의 신역에서 네가 행복할 리가 있니.
그렇구나. 그러면, 내가 카센을 다 정화해내면 그때는 데려가줄거야?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려무나. 하지만 생각 정도는 해볼까.
그렇게 이야기하며 카센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 때까지는 아무도 네 이름을 모르도록, 네 이름이 저 바보들의 손에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야겠다며 붓을 들었다. 그날 나는 사니와로서의 이름을 얻었다.

-처음으로 카센이 나에게 화를 냈다. 억지로 카센의 재액을 내가 나눠 몸에 받았기 때문이었다. 내 정화능력은 약하고, 그것이 카센을 파먹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괜찮다, 몸이 무너진다면 베어자르고 재생시켜서라도 버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화내는 카센을 마주 노려보았다.
내 곁에서 피안까지 함께 한다고 했지? 동감이야. 그런데 나는 아직 그 피안이라는 데 가기는 한참 멀었으니까, 카센이 먼저 가버리는거 싫어.......같이 있어줘. 뭐든 할 테니까.
카센은 그 말에 한숨을 쉬면서 나를 품에 안았다.

-......

-그럴듯해보이는 미봉책들 뿐이다. 하루하루를 그저 죽지 않고, 부서지지 않고 넘기기 위한 임기응변뿐. 카센에게 입을 맞춘 것은 영력을 사용해서 재액을 걷어 내 몸으로 끌어올 힘도 없어서 직접 신체접촉을 통해 재액을 넘겨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행위에 부수적으로 행복해졌다는 사실은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상처의 회복이 늦다. 영력이 고갈되었다가 차오르는 시간도 덩달아 길어지고 있다.

-미다레 토시로에게 오른팔을 당했다. 과다출혈로 기절했다. 겨우 깨어났을 때는 회복되어 있었지만, 영력이 고갈된 동안 끊어진 힘줄까지 다 고쳐지진 않았다.

-도검들의 공격이 나보다 카센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상처는 전보다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걸로 지킬수 있으면 그걸로 괜찮다. 누군가가 비웃었다. 그렇게 지키다가 네 앞에서 깨지면 정말 재미있는 일이겠구나.
나도 카센도 어차피, 끝은 예감하고 있다. 우리는 그저 서로가 하루라도 더 오래 무사하기를, 아니. 살아남기를 바래서 서로 기대고 서 있는게 전부였다.

-더 일찍 올 수도 있었던 끝은 그제서야 가장 원하지 않는 형태로 찾아왔다.

-그곳이 어디였더라도 너와 떨어지는 곳이라면 나는 행복했을 텐데.




(2)

-보고서보다 심한데. 전 사니와는 분명 조금씩 정화해가고 있다고 했을텐데.
아예 시도하지도 않은건 아니었나 본데.
재액으로 인해 무겁고 끈적거리는 분위기가 잔뜩 감도는 혼마루였다. 인수담당자는 옆에서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치스카 코테츠와 자신을 중심으로 재액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결계를 쳤다. 그리고 혼마루를 계속 둘러보았다. 확실히 군데군데 조금씩, 다른 곳보다는 재액의 불길함이 옅은 곳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6년동안 한 사니와가 해낸 정화라기에는 너무도 보잘것없다.
다른 도검들에게 물어보면 알겠지. 일단 일을 시작해볼까. 그렇게 말하며 인수담당자는 당분간 신이 내리고, 올라갈 곳으로 쓰기로 한 별채를 향해 축사를 읊으며 한 걸음씩 걸었다. 정화하지 않으면 드나들 만한 곳이 아니다.

-신의 말석이라 하여도, 재앙을 몸에 둘렀다 하더라도 본분은 신이기에 함부로 할 수는 없다. 파괴는 최후의 수단으로 두고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그 원통함을 씻어 보내는 일이다. 본령으로 되돌려보낸다면, 그 전에 그 원한을, 미움을 조금이라도 씻어주어야 한다. 전임 사니와가 카센과 단둘이 살았다는 폐허나 다름없는 별채를 정화하고 카미다나를 만든다. 본체를 놓을 좌대를 마련한 뒤 신을 진좌시키기 위해 찾아나선다.

-상처가 심했다. 연못가에 앉아있는 큰 체격의 남사를 찾아 다가가자 그는 바로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카락이 귀가 쫑긋거리듯 살랑거렸다. 곧,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다.
주인님께서는 떠나셨습니까.
살가운 태도다. 전 사니와는 중태로 병원에 이송된 상태이기에, 어떤 남사에게 어떤 짓을 얼마나 당했는지는 알 수 없다. 눈 앞의 도검남사가 얼마나 미쳐있는지도 직접 대화로 들을 수밖에 없다.
너희들 덕분에. 치유력은 대단한거 같으니까 아마 치료받고, 무사히 나을거야. 죽는거 못 봐서 아쉽겠네?
비아냥을 담아 말하자 코기츠네마루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반대입니다만. 아무도 주인님이 죽길 바란 적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분이 필요했으니까요.
어떤 의미로?
미움만으로 가득 차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그 미움을 풀어낼 상대는 필요했으니까요.

-기억을 더듬었다. 아마 그것을 완전히 죽여버리려 하던 이시키리마루를 말렸을 때도 같은 생각이었다. 치료받은 미카즈키를 산죠의 별채로 돌려보내고, 진노한 신검을 말렸을 때도 그렇게 말했다. 그 온화한 신검이 분노와 미움에 가득차서 스스로를 잃는 모습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지만, 정말 재앙 덩어리 같은 것으로 변하면 곤란하니까.이시키리마루를 돌려보내고 나서 피와 내장으로 질척거리는 땅을 밟고 걸어가 간신히 사람 형체만은 유지하고 있는, 상체와 하체가 척추와 가죽, 내장으로 겨우 연결되어 있는 사니와를 내려다보고 웃었다.
이래서야 재생은 느리겠군요. 혹시 죽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게 말하며 맥을 짚었다. 그 와중에도 약하게나마 맥박이 규칙적으로 뛴다. 코기츠네마루는 웃었다.
다행입니다. 조금 더, 같이 춤추지 않겠습니까?
이 닫혀버린 신역, 길을 잃고 헤매 들어온 소중한 존재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요리시로. 그들의 고통과 미움을 받아주려면, 아직 부서지면 안된다.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지만, 다른 남사들만큼 주인님과 자주 어울리지는 못한 편이라. 원하는 대답을 해드리지 못해 죄송하군요.
인수담당자는 무표정하게 그 말을 들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들 또한 가엾게 여겨 진혼하는 것이 의무이지만 인간인 이상 어려운 일이다. 코기츠네마루의 이야기에 감상을 말하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원한다면, 다른 곳으로 가게 해줄까? 그 곳에서 이딴 짓을 하지 않을 거라면 최대한 손을 써볼게. 더 이상 인간과 어울리고 싶지 않다면 그 재앙을 떨어내고 원한을 씻어 진혼해주고.

-주인에게 보이기 위해 털결을 다듬는 것도, 야생으로 지내는 것도 이미 질릴대로 질린지라, 가능하다면 공양받아도 좋겠습니까. 다 씻어내고 싶군요.
지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코기츠네마루를 보고 인수담당자는 철칙을 떠올렸다. 가해자로서 꾸짖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또한 아픈곳이 있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조용히 손을 내밀자 손위에는 한 자루의 태도가 얹혀졌다. 남자의 장신은 빛무리처럼 사라져버렸다. 코기츠네마루의 본체는 그가 이 혼마루에 있는 동안은 임시로 만든 신역에서 공양하다가, 모든 일이 끝나면 제대로 절차를 밟아 공양을 마치고 깨끗하게 본령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해할 예정이다. 겨우 하나가 끝났다. 신이 46주나 모여있는 곳. 앞으로 한참이나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한다. 다시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최대한 설득하여 본체를 확보해야 하며, 파괴는 최후의 수단으로 되도록 피한다. 사실 전투능력이나 도검을 제압할 힘도 없는 인수담당자이지만.

-전임자가 6년이나 여기서 살아남은 것은, 도검들이 원한을 풀 대상으로서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하긴, 자체 치유력만 뛰어난 사니와가 재액이 가득한 공간에서 마흔 여섯개의 적의를 받고 살아남는다는것 자체가 무리다.하지만, 사니와는 왜 지금까지 한번도 보고서에 제대로 상황을 적어서 제출하지 않은 걸까.

-아와타구치의 별채를 찾아가는 길은 알기 쉬웠다. 피묻은 돌길을 따라가면 됐다. 피투성이의 무엇인가가 질질 끌려간 자국이 몇개나 어지럽게 겹쳐져 있다. 그리고 나온 넓은 별채는 지독했다. 독기와 악취에 물들어 있다. 썩은 살점에서 나오는 악취와 재액, 독기가 별채의 입구를 지옥문처럼 보이게 한다. 손수건을 꺼내 따라오던 하치스카에게 건네주고, 자신도 옷자락으로 코를 막으며 인수담당자는 호신결계를 강화시키고 들어갔다. 별채의 방 중 한쪽의 작은 방 안에서 인수담당자는 히라노 토시로를 찾아냈다. 검붉은 것이 잔뜩 묻은 잡동사니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어린아이의 몸을 본 순간 그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설득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주군께서는, 돌아가셨습니까?
응.
어떻게 할까요. 전 주군께서는 매일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셨는데.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을 필요는 없다. 벽을 바라보자 가장 위쪽에는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라고 단정히 쓰여진 하얀 종이가 붙어있었고 그 밑으로 보이는 것은 표본용 실침으로 줄줄이 꽂혀있는 썩은 안구와 늘어져내린 시신경. 그 밑에 라벨지를 붙여 적어둔 적출일자가 보였다.
주군께서 언제나 숙제를 봐주셨는데 말이에요. 오늘은 어...음...아! 기억났어요, 오늘은 마에다랑 같이 해부실험을 한 날이니까 복습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군께서 안 계시네요, 어디로 가셨나요?
숙제를...봐주셨다고?
매일 잘 잊어버리셔서, 그럴 때는 이치고 형님이 데려다주셨지만요.
어디서부터 망가졌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인수담당자는 히라노에게 다가가서 손을 잡고 조심스레 영력을 불어넣었다. 임의로 현현을 풀어 본체로 돌아가게 하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전투력이 없으니 이런 거라도 있어야겠지. 피투성이 단도를 집어올리며 인수담당자는 정말로 원한깊은 검이라고 느꼈다. 옛날엔 아마 이런 검을 요도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피냄새가 짙은 검이다. 오래오래, 진심으로 기도를 올릴 수밖에 없다.

-별채로 돌아와 코기츠네마루와 히라노 토시로를 두고 향을 피웠다. 축사를 읊고 한참이고 정화를 하며 기도해야 했다.

-간략한 대화록을 작성했다. 이시키리마루에게 치명상을 입은 적이 있는 것으로 추측됨. 히라노 토시로에게 육체적 학대를 당함.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녹차 티백을 우린 보온병을 들고 다시 나갔다. 차를 좋아하는 도검을 만나러 갈 테니까 변변찮더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우구이스마루는 종이컵에 따른 녹차를 흔쾌히 받아들여 마셨다. 차를 마셔본지도 오래됐구나, 라면서 알 수 없는 눈으로 종이컵 바닥을 내려다본다. 적당히 우려낸 찻물 속에는 당연히 찻잎 같은건 떠있지도 않다.

-그 아이에게? 행위의 유무를 묻는건 어리석지 않겠나, 우리들 중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않은 자가 훨씬 더 적을텐데. 얼버무리다니, 당치도 않은 말을. 그러면 확실히 하는 것이 좋겠군. 나는 그 아이의 허벅지 근육을 끊어버린 적이 있다고. 인간의 몸으로 그런 치유력이라니, 놀랍더군. 미움이라. 인간다운 이야기를 하는군. 그 아이는 밉지 않았어. 그저 그 아이보다 먼저 온 아이가 가르쳐줬지. 인간을 베기 위해 만들어진 검이 생명을 소중히 하라던가, 싸우는건 좋아하지 않는다던가 헛소리라고. 해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다른 검에게 날을 세우고, 서로 부딪쳐 이가 나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그러면서 나의 검이 되어 모든 것을 해치라고. 그 아이의 말이 맞더구나. 살을 찌르고 근육을 휘젓는 것은 차를 마시는 것만큼이나 기분이 좋아.
우구이스마루가 든 종이컵 안에서 잔물결이 동심원을 그리고 있었다.

-우구이스마루: 전임에게 강도높은 세뇌를 받은 것으로 보임. 가학성과 호전성이 매우 강하다. 바로 다른 혼마루로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본체 입수 후 진혼절차를 거쳐 도해결정. 대화로 얻어낸 것은 그리 많지 않으나 전임자의 초기도를 파괴한 것이 헤시키리 하세베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보고서. (중략)전임자의 초기도는 카센 카네사다. 초기 보고서에 도검들에게 초기도를 빼앗겼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 뒤로 초기도에 대한 서술은 없다(후략)

-여기서 손에 넣은 검들을 가지고 돌아가면 신사에 둔 검이 세자릿수를 넘게 되겠다. 이래서야 요도 신사라는 오명을 지울 수가 없겠지. 그저 사연이 있는 신들을 달래고 있을 뿐인데. 다행스레 그리 상처가 깊지 않고 비교적 멀쩡한 검들은 다른 혼마루로 보낼 수 있었다. 매우 드물게, 정화와 정신적 치료를 위해 정부의 시설로 보내지는 도검도 있다. 아키타 토시로를 다른 혼마루로 보내줄 때, 아키타는 불안한 시선으로 주인님은 잘 계시겠지요? 라고 물어왔다. 고개를 끄덕이자 다행이라고, 정말로 안도하며 웃는 아키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임자는 모두에게 괴롭힘당하기만 한 것은 아닌가 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인수담당자는 찬물로 몇번이나 얼굴을 때리듯 거칠게 세수를 했다. 이입하지 말고, 제삼자의 이야기를 중간에 서서 듣듯, 소설을 읽듯. 몇번이고 중얼거리는 그의 옆에서 하치스카가 수건을 건네주었다. 조금 쉬지 그래. 담담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하치스카에게 인수담당자는 살짝 고맙다고 고개를 숙여보인뒤 곧 고개를 저었다.
일은 많고, 나는 세명밖에 들어주지 못했어. 그보다, 현세에서 연락은 있었어?
병원에 있던 전 사니와가 병원에서 자해를 시도했다고 하더군. 사람들이 저지했다지만, 그러지 않더라도 본인이 스스로 자살하는건 힘든 체질이 됐을 거라고 해.
그렇군...무엇인가, 그에게 도움이 될 거라도 얻는다면 가지고 돌아가야겠어. 아차, 이건 못들은 걸로 해주겠어?
하치스카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두 손을 들어 귀를 막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저 베었을 뿐이지 뭐, 우리야 무기잖아?
주인을 베고도 검이라고 할 수 있냐던가, 그런 말은 하지 않겠지만. 하지만 검이 주인의 손에 쥐여지지 않고도 검이냐고 지적은 해도 좋을까.
그것을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우리는 당연히 그 손에 쥐어진 것도 아니었어. 애초에 그것이 제대로 우리의 주인이었던 적이나 있었냐고. 시끄럽네 정말.
귀라도 찔러버리면 네 잔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텐데, 라고 투덜거리면서 도다누키 마사쿠니는 바위에 걸터앉은 채 인수담당자를 불만스러운듯 흘깃 바라보고선 다시 손에 쥐고 있는 자신의 본체를 내려다보았다. 언제라도 공격해올지 모르기에 얇은 방어결계를 몇겹이고 중첩해서 주변에 쳐두고 있었지만 그걸 아는지 아직까지는 칼을 휘두를 기색이 없다.
처음부터 우리는 정했었어. 그 빌어먹을 옛날 주인을 베고 나서, 새로 오는 것이 무엇이든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주인으로 모셨던 적도 없어.
......주인이 아니라면 바로 베어버리면 됐을 것을.
용도가 확실했거든. 다른 녀석들에게 못 들었나? 그것이 있었으니까 네가 다른 녀석들하고 대화라도 할 수 있는 거야, 우리가 아팠던 만큼 다른 무엇인가를 해치고 나서야 안도하는 거지, 아, 벨 수 있다. 우리는 그래도 아직 칼이다, 아직 무엇인가를 상처입히는 것이 즐겁다. 옛 주인놈에게 배운 유일한 거야. ......신 같은 게 아니다, 그저 도구고, 무기다. 인간이 휘두르는 대로 휘둘리고 부러뜨리는 대로 부러지고 망가뜨리는 대로 망가지는 것이 용도다, 그저 칼이다. 그렇게 계속 말했어.......칼이니까, 당연히 사람을 베었어야지.

-베는 대로 베이고서도 바로 회복해주니 그 이상가는 인간이 어디 있었겠어? 나같이 인간을 베고 싶어했던 녀석들은 그것을 진짜 좋아했어.
잘도 말하는군. 인간이 아닌 신에게도 감정이 있고 마음이 있을 텐데.
미안하다고 느낀 적이 없느냐고 설교할 거야? 길어질 거면 집어치워. 남에게 듣고 싶지 않으니까.
도다누키 마사쿠니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인수담당자에게 몇 발자국 다가왔다. 인수담당자는 솔직하지 않은 도검이라고 생각했다. 본체를 건네받고 가만히 바라보니 도다누키 마사쿠니는 현현을 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뒤의 처분은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말하겠다면서. 도다누키 마사쿠니의 본체를 허리에 차고 인수담당자는 가볍게 수첩에 기록을 남겼다. 이 혼마루에서 사니와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납득이 간다. 그래서 더욱, 사니와가 여길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을 납득하기 힘들다. 고통스러워서 그 또한 제정신이 아니었을까.

-하치스카를 별채에 두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군데군데 덜 씻어낸 피가 엉겨붙어 있는 금색 갑옷을 입고 있는 하치스카 코테츠가 자신을 딱 봐도 비우호적으로 보고 있었다. 인수담당자를 바라보던 시선이 도다누키 마사쿠니의 본체에 멈춘다. 적대적인 시선은 무엇을 생각하는 것처럼 바뀌더니 한참 뒤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손끝을 따라 시선을 두자 폐가 같은 본채가 시선에 들어온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를 묻자 하치스카 코테츠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기에 우라시마가 있으니, 데려가라. 이제는 지쳤다고 하더군. 바보같이 순한 아이라서, 그것한테까지 신경쓰느라 남들 두배로 지쳤겠지.
우라시마 코테츠는 전 사니와를 해치지 않았단 뜻으로 이해하겠다.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데려가겠어.
이야기라, 이제 와서 인간에게 이야기할 게 있나? 그것을 데려갔다 했으니, 그것에게 들어도 좋을 텐데.
너희의 상처입은 이야기를 묻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야. 때로는 그거 어쩌다가 다쳤느냐고 묻는 말 한마디조차도 상처가 되지.
하치스카는 약간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여기서 나가지 않은 이유라면, 하나밖에 생각하지 못하겠군. 카센 카네사다야.전 사니와가 부임해오기 전 이 혼마루에는 카센 카네사다가 없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그의 초기도의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카센 카네사다가 너희에게 잡혀있던 3년 간은 이해가 가지만. 그것만은 모르겠더군, 그것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아무튼 그것은 카센 카네사다를 찾고도 정부에 아무 보고도 하지 않고 계속 이 혼마루에 남아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변하지 않았지.
그러고 보니, 내가 도착했을 때 그 카센 카네사다는 깨져 있었지 않나.
일찍 왔다면 카네사다의 명검이 부러지는 모습도 볼 수 있었을걸, 그가 부러진 것과 네가 도착한 시간은 아주 조금밖에 차이나지 않으니까.
비웃듯 말하는 하치스카 코테츠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명도로서의 긍지는 땅에 떨어지고, 진품으로서 가져야 할 광채도 없지. 코테츠의 이름을 칭할 자격이 없으니 더 이상 존재할 필요도 없다.

-칼 두자루를 차고 보니 조금 무겁다.

-헤에, 칼 모으는 취미? 두명이나 있네.
우라시마 코테츠를 수습하러 본체로 발을 옮긴 인수담당자의 앞을 조그만 아이가 가로막았다. 인수담당자는 조금 긴장했다. 결계에 특화된 사니와이긴 했지만 그래도 대태도인 호타루마루를 상대로 자신이 잘 막아낼 수 있을지는 조금 불안하다.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할까 하고 망설이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호타루마루는 몇 걸음 다가왔다. 여기 있는 도검들은 누구 하나 피를 묻히지 않은 검이 없었다. 호타루마루는 유독 그게 심한 편이었지만.
사니와, 갔지?
알면서 묻는 건가.
그렇게 두드려도 안 가더니. 내 말은 결국 안 들어줬네.
무슨 말을 했길래?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죽일 거라고 했어. 나, 인간이 싫거든. 그래서 돌아가라고 했어.

-호타루마루가 자신에게까지 적의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기에 적당히 부러진 나무등걸에 앉아서 옆자리를 툭툭 쳐보였다. 호타루마루는 망설임도 없이 옆에 와서 앉았다. 어린 아이의 몸이지만, 여차하면 바로 자신을 벨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으니까 경계심을 보일 필요가 없어서 이렇게나 대담히 행동하는 건가 하고 생각하며 그는 물었다.
전 사니와는 카센 카네사다 때문에 혼마루를 떠나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그거, 우리가 잘못했다는 소리지?
내 입장에선 전 사니와의 편을 들 수밖에
.그래서 베어서는 안됐던 거야? 이유가 있으니까? 우리는, 우리에게는 이유가 없었어?
우리를 괴롭히면 안되는 이유는, 없었던 거야?
아팠는데.
쿠니토시도 아프고, 쿠니유키도 아프고.

-가라고 했는데 안 갔으니까 죽이려고 했는데, 잘 안 죽었어.
......
팔을 잘라도 다시 붙어버리고, 배를 찔러도 아물어버리고, 좋아하는 애들도 많긴 했지만, 나는 귀찮으니까 싫었어. 아...또 안죽었네, 하고 생각했어.
......
사니와도 죽기 싫었던 걸까.
......
그렇게 죽기 싫으면 나가버리면 됐을 텐데, 그렇게 말하니까 쿠니유키가 고개를 저었어.
아카시 쿠니유키가.
응. 우리가 가지고 있던 재액을 뒤집어씌워버린 카센 때문에 나갈 수 없을 거라고.
재앙신이 된 도검을 가지고 현세로 돌아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니와는 그 때문에 카센 카네사다를 구해내고 나서도 돌아오지 못했던 것이었나. 인수담당자는 그제서야 조금 알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온 이야기만큼 무겁고 깊은 한숨이다. 호타루마루에게 언제나처럼 향후의 대처를 이야기하고 의향을 묻는다. 호타루마루는 눈을 감았다. 반딧불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꽤나 긴 하루 일과였다. 대화한 도검의 본체들을 가지고 돌아가던 중 발치에 무엇인가가 치였다. 화려하게 장식된 낯익은 칼집이다. 상부에 따로 보고하지 않는다면 가지고 돌아가서 건네주는 정도는 문제가 안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인수담당자는 칼집을 집어들었다. 혹시 문제가 된다면 병자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서라고 우길 생각이다.

-일기: 보고서를 작성했다. 내일부터는 더 본격적으로 업무에 들어가야겠다. 그러니까 다 잊어버리자. 나는 손을 댈 수 없는 이야기다.




번외: 새해인사

-계절은 마음대로 바꿀수 있으니까 날짜에도 큰 의미는 두지 않았다. 당장 일주일 전에도 크리스마스를 별 생각없이 넘기기도 했고. 애초에 신들이 모여있는 혼마루에서 타 종교의 신이 탄생축일을 기념하는 것도 조금 그렇지 않나.
그러니 오늘도 다른 날과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남사들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일단 하루의 시작은 다른 날과 같았다. 자기들끼리 전날 근시를 정해둔 뒤 그 근시가 아침에 나를 깨우러 오는 것이 아침의 시작이다. 오늘의 근시는 우라시마였다. 우라시마는 생글생글거리며 들어오자마자 환한 얼굴로 말했다.
주인, 새해 복 많이 받아! 헤헤, 나 뭐 줄거 없어?
......응?
새해니까 세뱃돈!
뭐라고 하는 건지 따라가기가 힘들다. 일단 돈을 줘야 하는거 같긴 한데 월급은 다 계좌에 들어있고 쇼핑도 그냥 카드결제 같은 걸로 하니까...돈을 어떻게 줘야 하지. 고민하고 있으니까 우라시마가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내 앞에 마주앉았다.
뭐,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이번엔 주인 차례네. 빨리 인사해야지.
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렇게 말하자 우라시마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자기 몸 여기저기를 뒤적거려서 조그만 주머니를 하나 꺼내 쥐어주었다.
생각해보니까 주인은 아직 100살도 안된 어린애잖아? 세뱃돈은 우리가 줘야지. 주인이 올 한해도 새해 복 많이 받고 올해는 안 아팠으면 좋겠어.
얼떨떨하지만 일단 고맙게 받았다.

-설날이니까 오늘은 출진도 원정도 없는 것으로 정했다고 한다. 사니와인 나한테 한 마디 정도는 물어볼 수도 있지 않냐는 생각도 들지만, 어차피 나한테 물어봤어도 그러라고 말했을 테니 문제없지.
그런데 다 좋은데 남사들이 설날을 이렇게 중요시할 줄 몰랐는데...돈을 좀 찾아올 걸 그랬나. 괜히 눈치가 보여서 남사들을 바라보았지만 평소처럼 자기들끼리 혼마루의 일을 찾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내 방에서 우라시마가 갖다준 설음식을 먹고 있었다. 맛있다.

-오늘은 한 명씩 방문을 오는 날인가 보다. 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신나게 열어젖히고 시시오가 들어오자마자 우라시마랑 똑같은 짓을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시시오는 대놓고 세뱃돈을 달라고 한다는 점이다.
앞에 앉아서 눈을 반짝이는 시시오를 보고 솔직히 돈이 없다고 하자 시시오가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주인은 돈이랑 거리가 멀게 생겼거든!
그, 그냥 현금이 없는거 뿐이잖아.
그게 그거지 뭐.
생각해보니 카드나 예금 등의 개념이 있는 녀석이 이 혼마루 안에 몇 없긴 하다. 그것만으로 내 위상이 이렇게나 추락하다니.
아무튼 고마워, 시시오도 새해 복 많이 받아. 올해는...음, 애들하고 싸우기 없기.
으음, 어려운 주문이네, 그래도 곧 그렇게 될 거 같으니까! 주사부릴까봐 술도 못 마시고, 올해는 꼭 고칠거야! 그러니까 주인도 이제 몸에다가 못된 짓좀 그만하고!
요즘은 별로 안해...

-신년이니 참배 정도는 하셔도 좋지 않으십니까?
그러고 보면 혼마루 저쪽에 조그만 신사가 있긴 하지만 신검이라고 불리는 남사들이 혼마루에 없으니 딱히 관리를 할 수가 없다. 그냥 청소나 해주는 정도다. 그리고 나는 그 근처에는 가지도 않는다.
안 좋은 기억이 있으니까 신사에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자 하세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실 거라고 생각해서. 한번 오미쿠지 정도는 만들어 와 봤습니다만.
그걸 어떻게 만들어왔어?
당연히 제대로 만들지는 못하니 가볍게 기분이나 내시라고.
그냥 종이쪽지를 여러개 접어서는 작은 상자 안에 넣어온 것 뿐이었지만 그 배려가 고맙다. 상자 안에 손을 넣어 쪽지를 한개 집어 펴보니 대길이라고 쓰여 있었다.
하세베.
왜 그러십니까?
상자 안에, 흉도 있어?
......
눈을 돌리며 딴청을 피우는 걸 보니 분명 대길밖에 없을 것이다.

-처음엔 흉도 만들어 봤습니다만...
음, 그런데?
모노요시 사다무네가 가져갔습니다. 주인님의 운세에는 필요없다고 하더군요.
뭔가 찡해진다. 얘네 정말 왜 이러지. 나중에 모노요시를 찾으면 꼭 고맙다고 말해줘야겠다.

-우리 주인, 새해 복 많이 받고 올 한해는 건강해야지!
그래그래, 고토도 새해 복 많이 받고.
헤헤. 그래서 준비해왔어, 방금 마에다랑 히라노한테도 주고 오는 길이야.
고토가 하얀 봉투를 하나 내민다. 역시 겉모습은 나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단도한테 세뱃돈을 받아도 뭔가 면목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걸 아는지 고토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 뭐하면 그걸 마에다하고 히라노한테 줘도 괜찮아! 주군하고는 아직 어색하지만 그래도 새해 인사 정도는 드려도 될지 자기들끼리 고민하고 있는거 같으니까.
너, 정말 좋은 형이구나...
그치? 키만 조금 더 크면 더 바랄 게 없는데 말야.

-고토한테 들었는데 말야, 인사해도 괜찮아. 당연한 거잖아.
그렇습니까?
하지만 저희는...
한 식구지.
아...
그거 말고 다른 표현을 잘 모르겠네,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말이어도 괜찮지만, 인사를 머뭇거릴 만큼 먼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렇군요.
마에다가 머뭇거리는 것을 다독이며 히라노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주군. 신년인사를 하시는 길이라면 동행할까요?
음...부탁하고 싶지만, 마에다가.
......죄송합니다.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신년 인사를.
마에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거기까지는 거부하지 않는 사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더 친해지려면 노력해야겠지.

-계절을 바꾸는 게 어떤가.
겨울은 겨울이잖아.
그런건 신경쓰지 않는 주의 아니었나, 그리고 계절을 바꾸지 않을 거라면 옷을 더 두텁게 입어.
하하, 고마워. 그보다 너부터 그 소매 좀 그만 걷고 다니지 그래, 보는 내가 다 춥단 말야.
내 마음일 텐데, 그런 건.
그것도 그러네. 아차, 새해 복 많이 받아.
음.
나같은 사니와도 주인이라고 생각해줘서 고마워.
새해인사 뒤에 그런 입맛쓴 말을 붙이지 마라.
그런가...
딱히 설날이라고 어울려줄 생각은 없지만, 혹시라도 필요하면 불러라.
응, 고마워.

-우라시마에게 세뱃돈을 받았다며? 그렇다면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
그렇게 되나? 아무튼 하치스카도 새해 복 많이 받아.
하하, 그래. 이제는 나름 인사도 할 수 있게 됐네.
그건 너를 처음 데려왔을 때부터 그랬잖아.
아니지, 그 때는 더 불안하고 영 보기 힘들었거든. 그땐 나는 나대로 다른 데 신경을 쓰느라 네가 그렇다는 걸 몰랐지만.
......가, 갑자기 이런 날에 그렇게 진지하게 분위기 잡지 말란 말야. 어색해.
그렇다면 그만두지. 그리고 이거.
너무 두터운데요, 진품 코테츠님.
격식이란 건 중요하거든. 필요없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도 중요한 거니까. 너도 조금 더 드러낼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하하하하, 설날이라는 것은 좋구나. 먹을 것이 많아.
볼 때마다 신기하네, 살도 안찌고. 그렇게나 먹는데.
칼이 아니더냐, 칼이 살쪄도 이상한 일이지. 잠시 옆에 앉아보겠느냐?
응? 여기 앉으면 되나. 어, 이건 왜 주는 거야?
세뱃돈을 줘야겠지만 이걸로 대신해도 괜찮겠느냐.
응? 그런건 상관없어. 나도 과자 좋아하니까. 고마워.
하하하. 다행인지고. 올해는 아프지도, 다치지도 말거라.
음...노력할게. 미카즈키도 새해 복 많이 받고.
그럼그럼, 그래야겠지. 나는 주인이 챙겨주는 것이 좋으니 주인과 백년해로하고 싶구나.
......
주인을 챙겨주는 것도 좋단다.

-오미쿠지 고마워.
아니에요! 주인님께는 언제나 행운이 가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대길만 가득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 했는데.
앗, 그럼 제가 잘못 생각한 건가요? 죄송해요...
으아아, 아, 아니야. 풀죽지 마. 덕분에 올 한해는 좋은 일만 가득할 거 같으니까.
진짜지요...?
그럼그럼. 그러니까 모노요시도 새해 복 많이 받아.
에헷, 감사합니다!
굳이 오미쿠지가 아니더라도, 모노요시가 있으면 분명 행운이 가득할 테니까.
진심이었다. 굳이 다들 노력해서 모노요시를 데려다준 의미를 알고 있다. 그러니까 분명 모노요시는 행운의 상징이고, 같이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

-신년 선물이야.
으음, 주인이 가진 나에 대한 이미지가 일단 술이라는 건 알 것 같군. 부정하진 못하겠지만.
주면 받을 거잖아.
그건 그렇지. 한 잔 하겠는가?
음...오늘은 마셔도 괜찮아.
초하루니까. 아무튼 주인이 대작해준다면 기쁜 일이지. 받아.
많이는 못 마시는데.
그건 알고 있어, 술을 못 마시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권하는 건 주도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
첫 잔에 주인의 무병장수를 기원해 볼까.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응, 니혼고도.
주인의 상처에 이 첫 잔이 소독이 되면 좋겠군.

-주인! 신년이니까 잔치하자!
축제가 아니라?
신년에도 축제해도 되는 거면 축제도 좋지!
이제 완전히 밝아졌네, 보기 좋아.
헤헤, 여기에선 그렇게까지 무서워할 거 없으니까.
그렇다고 말해주면 나도 좋지. 자, 새해 복 많이 받아.
우와, 이런건 내가 주인한테 줘도 되는건데! 정말 받아도 돼?
그럼. 뭐, 내가 더 어리지만은...괜찮지?
음...그렇게 말하니까 역시 주인한테 뭔가 줘야 할 거 같고...자, 이거!
내가 준 거잖아.
응, 그러니까 내 돈이고 내 돈으로 주인한테 세뱃돈을 주는 거지, 새해 복 많이 받아야 돼!
뭔가 이상하지만 받아야겠지, 고마워.
응, 그리고 주인, 저번에 한 말 취소야. 살아있으면 좋은 게 많아!

-하루종일 어딜 그렇게 돌아다녔어! 찾아다녔잖아!
아니, 그게...미안.
나한테 제일 먼저 와서 새해인사도 안해주고. 이제 다른 애들이 더 귀엽다 이거지?
그거 아니라니까, 미안해. 카슈한테 먼저 갔어야 됐는데.
흥.
나도 실망이구나, 요 녀석아. 어찌 그렇게 다른 녀석들만 먼저 찾아다니느냐.
엑, 왜 츠루마루 씨까지 온 거야. 둘만의 시간을 주면 안돼?
내가 그렇게 놔둘 거 같으냐,
오늘은 기본적으로 맨투맨으로 모두를 대하기로 했는데...둘다 뭐하는 거야. 우선 싸우지 말고. 새해잖아.
치, 주인이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
그래그래, 사이좋게 지내자꾸나, 신선조의 꼬마야.
진짜 둘 다...일단은 설날이잖아. 둘 다 새해 복 많이 받고, 올 한해도 잘 부탁해.
둘 다 어떤 의미로든 나에게는 처음이다. 죽으려던 내가 처음 만나서 처음 치료했던 검, 내가 처음으로 선택해서 함께 한 검. 둘 다 정말로 소중하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슈와 츠루마루는 웃었다.
주인도 새해 복 많이 받아! 주인, 요즘 많이 좋아졌으니까 앞으로는 더 나아질 거야.
그래그래, 네가 얌전히 있는 만큼 나도 이렇게나 멀쩡해지지 않았느냐. 이제는 흉터도 많이 없어졌단다.
아니, 굳이 손목을 보여줄 필요는 없으니까...그리고 나도, 어떻게든 이겨내고 싶으니까.
그렇겠지, 그러면 함께해주마.
나도나도! 주인이 준 것만큼 꼭 돌려줄께!

-너무 큰 것을 새해 첫 날부터 많이 받아온것 같다. 누운지 한시간이 넘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는게, 왠지 기뻐서 두근거려서 그런거 같다.
올해는 조금이라도 더 저들의 주인으로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역시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새해 첫 날에 추억에 발목을 붙잡혀서는 안 되는데도.
오늘 하루만 그리워하기로 하자.




번외: 만우절

-츠루마루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기절할 뻔 했다. 만우절인데 놀랐냐는 말을 듣고 때려주었다. 장난은, 정말로 그게 장난일 수 있을 때 해야 하는 일이다. 너도 나도 아직 손목뼈가 보이도록 그었던 흉터가 작게 남아있다.

-카슈는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오늘 하루동안은 내가 뭘 하든 못 믿을 거 같아서 그게 싫다고 했다. 너는 내가 거짓말을 해도 믿을 것이다.

-오오쿠리카라는 조용히 장난을 당하고 거짓말을 듣는다. 나는 그래서 오오쿠리카라에게 딱히 말을 걸지 않았다가 금방 후회했다. 외로운 표정이었다. 너는 홀로, 내 곁에 있는다.

-하세베는 반응이 늦다. 나를 바보를 보듯 내려다보다가 3초 뒤에서야 속은 척을 해준다. 나를 필요한 만큼만 아껴주는 배려는 오늘도 변함없었다. 너는 나를 숭배하지 않고 기대지 않는다.

-시시오한테는 장난을 치면 안된다. 아까도 말했듯이 장난이 장난일 수 있을 때에서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츠루마루는 시시오를 놀래켰다가 수리실로 실려갔다. 너는 아직도 이를 드러내고 있고, 입을 다물려고 애쓰고 있다.

-우라시마가 토끼로 분장시킨 카메키치를 들고 나타났다. 할로윈은 아닐 텐데. 그래도 지금까지 중엔 가장 온건하게 만우절을 즐기고 있다. 너는 이제 당연한 듯 작은 거북이를 데리고 봄의 혼마루를 걸어다닌다.

-하치스카는 만우절에 대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거짓말은 그것이 선의이든 악의이든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혼마루에 없는 남사의 흉을 봤다. 너는 이제 형의 이름에 얼굴을 찡그리게 됐다.

-미카즈키는 나만큼이나 만우절 장난을 많이 당한다. 우리 혼마루의 남사들은 대부분은 장난이 서툰 편이라 고작 장난이라고 해봤자 당고와 먼치킨 도넛을 바꿔놓는 정도다. 너는 이제 차랑 과자만 있어도 행복하게 웃게 되었다.

-아이젠과 츠루마루가 손을 잡았다. 한나절 정도 남은 만우절의 재해레벨이 올라가는 소리가 들린다. 만우절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너는 이제 축제를 기다리는 아이가 되었다.

-마에다와 히라노는 동요하지 않고 언제나처럼 서류와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서류 내용이 '모범적인 화이트혼마루의 사례 100선' 으로 바꿔치기 돼 있는 것을 보면, 저 천연덕스러움까지 완벽하다. 너희는 겨우 내게 장난을 칠 수 있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모노요시가 준 네잎클로버는 사실 세잎클로버에 잎을 하나 더 붙인 것이었다. 장난스러워도 행운은 행운이다. 클로버가 가짜인 건 상관은 없겠지. 너는, 언제나 내게 연분홍색의 행운이다.

-니혼고가 술을 줘서 마셨다가 뿜었다. 소금물이었다. 나를 보고 웃으면서 자기는 술병을 들이키기에 놀라서 뺏았다. 그건 진짜 술이었다. 벼슬에 안 어울리게 정말이지. 하지만 너는 나를 조금은, 더 너희 쪽으로 끌어당겨 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고토가 장난에 지친 나를 위로해주었다. 고마웠다. 하지만 콩을 넣어 밥을 지어선 그 콩을 내 밥그릇 밑에만 가득 깔아둔 건 글쎄...편식은 좋지 않지만. 너는 나에게도, 형제들에게도 언제나 좋은 형이다.




낙서1

-우라시마랑 티비를 보고 있었다. 요즘 티비는 어느 채널을 틀어도 어렵지 않게 요리와 관련된 프로를 볼 수 있는 것 같다. 출연자가 고기와 야채를 썰고 익히고 소스를 만드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우라시마가 문득 말했다.
저거 맛있겠다.
응? 저거 고기잖아.
주인은 날 바보로 알아? 저게 고기인 줄은 나도 알아.
우라시마의 편식은 나보다 심하다. 그래서 야채 반찬밖에 먹지 않던 녀석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갑자기 무리할 필요 없는데.
그냥 그렇게 느껴진 거야. 이상하지, 전에는 고기만 봐도 입안에서 피맛이 나는거 같았는데. 막 입안에서 길다란 머리카락이 입천장에 달라붙는 느낌도 들고. 그런데 지금은 안그래.
그건 다행이네. 한 번 먹어볼래?
조금 무섭지만, 이왕 시도할 거면 맛있어보이는 걸로 하는 게 나을거 같아.

-재료가 갖춰져있으니 만들어주겠다고 말하며 하세베는 신기한 표정을 짓고 나와 우라시마를 바라보았다.

-식사시간은 평소와 같았다. 메인 요리는 맛있었다. 평소보다 고기를 조금 더 많이 먹었더니 옆에서 카슈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슈는 대체 나를 뭘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이러다가는 일어나서 걷기만 해도 박수를 칠 것 같다.
식사를 먼저 마친 남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알아서 할 일을 하러 간다. 남은 것은 식사속도가 느린 나와 옆에서 큰 반찬을 작게 찢어내주는 카슈, 원래 식사를 느긋하게 하는 미카즈키, 그리고 맞은 편에서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라시마 뿐이었다.
먹지 않는게냐, 오늘 고기는 간이 잘 배어 맛이 있단다.
미카즈키는 분명 우라시마가 젓가락을 고기에 가져가다가도 연신 옆 접시의 나물만 집어 가져가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우리 혼마루의 천하오검은 음식에 한해 감이 예리하니까. 정말로 진지한 표정으로 접시를 바라보던 우라시마는 조그만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젓가락 끝이 떨리고 몇 번이고 고기를 놓치고 있었지만 아무도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겨우 고기를 입에 넣고 한참을 그대로 있다가 우라시마는 겨우 턱을 움직였다. 한 번. 두 번. 네 번. 열한 번. 조금씩 움직임이 평소처럼 부드럽게 변해가고 있었다. 연신 움직이는 턱선을 따라 투명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우라시마는 남은 밥 세 숟가락을 고기반찬과 함께 비웠다.



낙서 2

-전임자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은 곳은 아와타구치였다. 불행하지 않은 아와타구치, 행복한 아와타구치.

-미다레 토시로는 아와타구치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아이였다. 달아오른 몸을 이기지 못하고 형제들에게 몸을 부비며 이성이라고는 조각도 남아있지 않은 달콤한 목소리로, 추잡한 말로 형제들에게 한껏 조른다. 그러면 형제들은 원하는 대로 미다레를 붙잡아 묶고 돌아가며 강간했다. 쾌락에 한껏 빠져 교성을 내지르며 미다레는 조금이나마 형제들에게 미안해했지만, 곧 찾아오는 사정의 고양감에 눌려버렸다. 미다레는 사랑받아서 행복했다.

-주인은 야겐 토시로에게 다른 남사들을 치유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주인은 아무도 치료해주지 않기에 대신 야겐이 모두를 치유해야 했다. 포학은 언제나 혼마루 전체를 휩쓸고 손은 턱없이 부족했다. 야겐은 그 사실만으로도 불행했지만, 모두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모두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 모두를 살릴 수 있다. 그렇기에 야겐은 불행하지 않았다.

-히라노 토시로는 형제를 돕길 원했다. 주인은 히라노에게 집중적으로 의술을 가르치기로 했다. 해부재료는 차고 넘칠 만큼 있었고, 히라노가 최대한 빨리 모든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해 재료는 히라노가 특별히 각별하게 여기는 마에다 토시로로 한정했다. 히라노가 능숙하게 상처를 꿰매고 소독하거나 위중한 상처를 수습할 때까지는 32명의 마에다가 필요했다. 그동안 히라노는 미쳐버렸다. 아직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기에 불행하지는 않았다. 마에다는 매번 죽었기에 불행하다 느낄 틈이 없었다.

-고코타이의 호랑이가 굶주린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었다. 호랑이는 야생동물이니 혼마루에서 직접 먹이를 구하도록 해야지, 라는 말과 함께 고코타이는 고생했다. 호랑이는 굶주렸고 자신이 돌봐야할 동물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기에 고코타이는 벌을 받았다. 그 뒤로는 같이 굶게 되었다.
어느날. 배고픔에 늘어져 있던 고코타이의 시선이 무엇인가를 물고 들어오는 호랑이에게 향했다. 뜯어먹다 남긴 인간의 손, 빨간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끝은 그것이 누구의 손인지 알 수 있게 한다. 혼마루 한편의 시체무덤에서 물고 왔겠지. 색깔이 약간 변색된 그것을 핥으며 호랑이가 바닥을 뒹굴고 논다. 고코타이는 제지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날은 형제들과 같이 밥을 먹었다. 고코타이는 행복해졌다.

-아키타 토시로는 바깥에 대한 호기심을 잃은지 오래다. 주인은 아키타가 궁금해하는 것을 하나씩 체험해볼 수 있게 해주었다. 밭일을 하다가 개미를 들여다보고 있던 아키타를 본 주인은 그 날 아키타에게 개미를 먹였다. 벌을 보고 감탄하던 날에는 어디서 쌍살벌을 가져와 아키타의 몸에 알을 까게 했다. 지네를 보고 놀란 날엔 지네구덩이에 빠뜨렸다. 아키타는 이제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저 텅 비어있다. 벌레먹은 단도는 텅 비어있기에 불행하지 않다.

-나키기츠네는 스스로 잘 말한다. 여우가 말하지 못하는 만큼 더 열심히 말한다. 여우는 여우니까, 말하면 안되는 거다. 이치대로 따지자면 자신이 말하는 것이 맞다.
혀를 잘리고 이를 뽑힌뒤 주둥이가 꿰매어진 여우는 말하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이 말하는 여우만큼 더 많이 말을 해야했다. 나키기츠네는 행복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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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나무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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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 혼마루(前) 2018. 11. 16. 11:38

※해당 연성은 도검난무의 2차 창작으로, 원작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블랙혼마루 등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설정을 다수 다루고 있습니다.

※과거묘사에 캐릭터 개악/헤이트 창작으로 보일 수 있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폭력 및 고어요소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리지널 사니와가 주인공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첫 비보의 마을 이벤트 때 썼던 거 같습니다. 중간보상으로 창이 있었는데 기네였는지 톤보였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ㅠㅠ 이해해주세요 옛날이잖아요)






번외/하세베의 시점

-주인이 방에 있는 동안 주인이 데려온 두 도검을 돌봤다. 마에다 토시로의 피에 잔뜩 젖은 왼쪽 소매에도, 히라노 토시로의 갈기갈기 찢어진 오른쪽 소매에도 이제 제대로 멀쩡한 팔이 있다. 하지만 몸이 멀쩡하다고 마음까지 바로 아무일 없단 듯 고쳐질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 주인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다른 혼마루의 검들과 같았을 것이다. 병든 마음이 다시 맑게 개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마에다 토시로와 히라노 토시로에게 이 혼마루가 어떤 곳인지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다른 도검들을 소개했다. 사니와에 대해 묻기에 얼버무렸다. 평소에는 당사자에게 직접 말해대긴 하지만 그렇다고 주인을 아픈 사람이라고 제삼자에게 소개하기는 힘들다.

-히라노 토시로가 자해했다. 팔뚝 반까지 들어간 본체를 빼앗고 수리실에 데려가 수리했다. 착란을 일으킨 히라노 토시로는 팔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그렇게 말했다. 두 단도의 전주인은 쌍둥이처럼 닮았으니 이런것도 해볼만하지 않느냐고 둘의 몸을 이어붙이려고 했던거 같다. 상대적으로 상태가 나아 경위를 설명하는 마에다 토시로도 오한이라도 온듯 덜덜 떨고 있었다.
주인에게도, 우리들에게도 익숙한 피냄새가 나는 이야기. 그러고 보면 주인도 아마 방에서 떨고 계실 것이다. 조금 있다가 다른 도검에게 보러 가달라고 부탁해야겠다. 마에다 토시로를 달래면서 당분간 히라노 토시로의 본체를 맡아두고 다른 도검이 붙어 지켜보겠다고 약속했다.

-조금만 과거가 떠올라도 약속처럼 무너지는 주인이다. 카슈 키요미츠에게 목욕을 시켜드리고 새옷을 입히도록 시켰다.

-주인이 방에 칩거한 동안에도 혼마루는 평소와 다를바가 없다. 우리들이 하던 대로 대원과 대장을 정해 출진을 나가고 원정을 나간다. 요즘은 두세명은 남아서 아직 도움이 필요한 도검을 돌보곤 한다. 오늘은 출진을 쉬고 원정인원을 늘렸다. 남은 도검들은 단도들을 돌보고, 오늘의 근시인 나는 주인을 돌본다. 멀쩡한척 하시는 얼굴이 밉살스럽다. 아침식사로 가져간 쇠고기죽을 보고 약간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셨다. 어제 흘리신 피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주인께서 스스로 몸을 해하실 때마다 고기로 음식을 만드는 것은 나의 사소한 심술이고, 반항이다.

-밭일 당번들이 고구마를 가져왔다.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손끝에서 군데군데 피가 배어나오는 것도 아랑곳않고 흐뭇한 얼굴로 겉옷 후드에 담긴 밤을 보여주었다. 같이 나눠먹고, 밤은 삶아서 주인께 드리는게 어떠냐고 제안하자 반대하는 도검이 없기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삶은 밤을 가지고 가서 까 드리면서 직언을 했다. 아직 히라노 토시로가 무섭다고 하셨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그때는 밖에 나가서 직접 무서워하는 기색없이 인사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시는 주인의 손끝은 마에다 토시로가 그러듯 떨리고 있었다.

-주인이 계시던 혼마루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아는 도검은 없다. 그나마 카슈 키요미츠와 츠루마루 쿠니나가가 조금 알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둘은 유독 주인을 아끼고 보필한다. 물론 그건 주인을 모시는 우리들 도검남사로서 당연한 자세이지만.
주인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아니라면, 주인을 모시기 위해서는 불충을 각오하고 여쭈어 보는 것이 나을까.

-얼버무리셨다. 너희와 비슷한 일이라고만 말했고, 너희가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주인은, 그 혼마루의 다른 나에게 무슨 일을 당하신 것일까.

-주인이 며칠 뒤 방을 나섰다. 마에다 토시로와 히라노 토시로와는 첫만남이었다. 많이 안정되어 있는 쌍방이니 온화한 만남일 거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뿐이었다. 배를 찔리셨으나 상처는 깊지 않았다. 나는 마에다 토시로를 잡아 눌러 제압하며 그가 안정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후회했다. 배를 꾹 누른채 무너져 웅크린 주인을 안채로 모셨다. 치료라고 해도 치유력이 있으니 일단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붕대를 감아두는 정도가 전부다. 상처를 꿰매는 것은 오히려 나중에 실을 빼는 게 귀찮다며 만류하시는 주인을 보고 머리를 조아려 사죄드렸다. 주인은 오히려 웃으며 나를 힘없는 팔로 일으켰다. 칼침 한두번 맞는줄 아느냐고 태연하게 말하다가도 배가 아픈지 인상을 찡그리시는 모습이 마음이 아팠다.

-상처가 나은 뒤 주인께서는 마에다 토시로의 현현을 푼 뒤 형제의 실책을 사색으로 사죄하는 히라노 토시로를 달래셨다. 마에다는 아직 놀랐으니까, 조금만 쉬게 두자. 그 동안 너도 편하게 있어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며 히라노 토시로에게 최대한 웃어보이시면서도 손은 대지 않는다. 그들이 인간의 손길을 싫어할 거라는 걸 알고 그러신 거겠지.

-며칠간 다시 방에서 정양하시도록 했다. 밭일 담당중 하나가 돌보고 있던 아이젠 쿠니토시가 오늘은 웬일인지 같이 밭일을 하러 갔다. 돌아오더니 조그맣고 상한곳 없는 고구마를 쥐고 주인의 방을 찾아와선 주인에게 고구마를 쥐어주었다. 주인은 웃으면서 아이젠 쿠니토시를 안고 등을 토닥여주셨다.

-조그만 일이 있더라도, 혼마루는 평온하고 조용하다. 그것은 아마 주인이 이 혼마루의 사니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주인의 주명을 받들어 모시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15)

-마에다를 다시 현현시켰다. 공격받지는 않았다. 만약 다시 공격을 해왔더라도 옆에 서있던 카슈가 막아줬겠지만. 주인으로 모시거나 명령을 들어주지 않아도 되니까 히라노 옆에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대청소를 하는 날이다. 모두 넓은 혼마루를 하루종일 청소하고 지쳐있는 동안 오늘의 식사당번들이 준비한 점심을 같이 먹었다. 마에다와 히라노는 어색해한다. 도검은 밥 따위 먹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같이 먹고 싶다고 되받아 말했다. 그리 맛있지 않더라도, 먹어줬으면 좋겠어. 그건 저에 대한 질책이십니까. 하세베에게 슬쩍 장난을 걸 겸 말해보았다. 마에다가 머뭇거리는 동안 히라노가 앞에 놓인 젓가락을 들었다. 천천히 밥을 입으로 가져가서 한 알씩 씹기라도 하듯 정말로 천천히 턱을 움직였다. 모두들 조용히 밥그릇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옆의 동작에 이끌리듯 이어서 마에다가 식사를 시작했다. 우는 것은 모른척 해주는게 예의다. 식사가 끝나고 마에다와 히라노를 욕실에 데려가서 세수를 시켰다. 정확히는 물을 보고 멈칫하길래 그냥 수건을 물에 적셔 얼굴을 닦아준 거 뿐이지만. 코도 풀어줘야 할까 조금 고민했지만 사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도검들이니까 너무 어린애 취급을 하면 안될 것같기도 하고.

-아이젠이 방에 들어오더니 슬쩍 내게 다가와선 내가 덮고 있던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조금 있다가 시시오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더니 아이젠을 못봤느냐고 물었다.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건가 싶어서 못봤다고 고개를 저었다. 한참 뒤에야 아이젠이 고개를 내밀고는 살짝 웃었다. 이 정도가 지금은 좋다. 앞으로는 조금 더 많이 웃어줬으면 좋겠다. 아이젠 쿠니토시라는 도검남사는 언제나 기운차게, 웃으면서 신나게 뛰어다녀 줬으면 한다.

-이제는 완전히 혼마루의 일원이 되어 미카즈키의 애니멀테라피 담당을 맡고 있던 콘노스케가 갑자기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는지 정부의 공문을 가져왔다. 읽어봐도 딱히 뭔가 끌리지도 않고 해서 그냥 책상 한쪽에 뒀다. 지금 있는 도검들로 충분하다 못해 남아도는데.

-요즘은 또 할일이 없다. 다들 이젠 케비이시가 나올 만한 장소도 알고, 어떻게 대비해야 되는지도 대충 알아서 그런지 내가 출진이나 원정 계획을 짜줄 필요는 없고 편히 쉬라고 한다. 1부대가 출진나가는 동안 나는 혼마루에 남은 도검들이랑 같이 집안일을 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꼭 평범한 가정집 같은 기분이 든다.

-1부대는 상처 하나 없이 돌아왔다. 그런데도 어딘지 지쳐보였다. 너무 혹사시켰나 미안해져서 저녁은 고기 위주로 준비하기로 했다. 후식으로 과일도 한가득 준비해 남사들이랑 같이 먹었다.

-카슈랑 츠루마루랑 하세베가 수상하다. 나만 보면 괜시리 웃으면서 말을 돌린다. 그리고 자꾸 자기들끼리 속닥거린다.
저 둘은 몰라도 카슈까지 그러다니 너무해, 벌써 그런 나이야? 이 사니와는 슬프단 말야.
뭐라고 하는 거야, 주인보다 내가 나이는 훨씬 더 많다고.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왜 나한테 비밀을 만들어? 우리 이런 사이였어?
카슈가 멈칫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드라마 대사를 생각해내서 읊어보면 될 것 같았는데 카슈는 아깝게도 미안하다면서 도망가버렸다.

-미카즈키가 어디서 났는지 부적을 쥐어주며 위험한 곳으로 가게 될때 네가 잃고 싶지 않은 남사에게 쥐어주라고 말했다.

-원정을 나간 남사들이 커다란 도시락을 들고 왔다. 모두가 같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부적이고 도시락이고, 원정으로 손에 들어오는 건 아니다. 대체 뭘 하는 거지.

-이불을 널러 가던 츠루마루가 넘어졌다. 다행히 혹만 조금 난 정도였길래 일을 도와주고 누워서 쉬게 시켰다. 왜 넘어졌냐니까 그냥 미끄러졌다고만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역시 뭔가 신경쓰이는 일이 조금씩 늘어가는 것 같다.

-츠루마루가 넘어진 자리에서 옥색 구슬을 하나 주웠다. 혹시나 해서 방으로 돌아와보니 공문이 없었다. 남사들을 소집했다.

-그 공문 말인데, 굳이 의무는 아니야. 내가 의무를 다하지 못해서 정부에서 질책이 내려올까 걱정해서 구슬을 모은 거라면 굳이 그러지는 않아도 돼.
응? 그런건 관심없는데. 혼나는 건 주인이지 우리가 아니고, 정부에서 주인한테 그럭저럭 잘해주는 것도 알아.
뭐? 아, 아니, 딱히 정부에서 나한테 잘해주는건 없는데. 그보다 그러면 왜 구슬을 모았어?
공문을 읽었다. 모노요시 사다무네를 입수할 수 있다고 하더군.
응. 그치만 관심없어서...혹시 오오쿠리카라, 타이코가네 사다무네 말고 그 모노요시도 아는 사이였어?
하하하, 무슨 잠꼬대를 하는게냐. 나도 쿠리카라도 그 아이랑은 면식이 없어. 우리는 그저 네게 작은 선물을, 놀라움을 주고 싶었을 뿐인데.
모노요시? 그러니까 굳이 새 도검을 데려오지 않아도 괜찮...
그 모노요시라는 아이는 너도 아직 만난 적이 없다 하더구나, 그러하더냐?
그건 그렇지만.
하하하. 그러니 어찌 좋지 않으냐. 네게 칼을 댄 적이 없고, 네게 재앙을 준 적이 없는 도검이 올 수 있는 기회인데.
맞아맞아. 그러면 주인은 덜 무섭지 않을까?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하세베가 웃으면서 말했다.
풍문에 따르면 모노요시 사다무네는 행운이 따르는 도검이라 합니다. 그 행운이 이 곳에 있다면 주인께도 경사스러운 일이 있지 않을까요.

-나쁜놈들. 단체로 사람 눈물샘을 박살내고 있다.

-구슬을 모으면서 좋은 것은 다쳐서 돌아오는 남사들을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정신적인 소모는 있는 모양인지 구슬을 한가득 갖고 돌아온 남사들은 지친 표정이다. 웃고 있지만. 처음에 독화살 때문에 제대로 활약도 못하고 빠져야 했다고 혼마루 내 최고 연도의 위엄을 자랑하는 초기도가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태도나 나기나타가 있으면 더 편할 텐데.
네게 무리가 안된다면 그때나 데려오지 그래. 우리는 상관없으니까.
음...이시키리마루랑 호타루마루는 아직 보기 힘들고. 지로타치도 조금 무섭고. 그나마 가장 양호한게 타로타치 정도겠네. 한번 정부에 물어볼까?
배에 칼침맞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도검을 받아오려는 거지. 그렇게나 죽고 싶나.
쉿.
혹시라도 저쪽에서 히라노와 같이 기록을 정리하던 마에다가 들을까 놀라서 바로 오오쿠리카라를 말렸다. 그도 자기가 실언을 했구나 싶어서 바로 입을 다물고는 두 단도가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하고 있는걸 조심스레 확인했다. 다행히 둘 다 듣지 못한거 같다.

-지로타치는 다른 대태도처럼 내 팔다리를 뎅겅뎅겅 베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를 볼때마다 밝게 웃으며 인사했고, 술을 권하기도 했다. 멋모르고 몇번인가 술을 받아마셨고, 그때마다 분명 한잔임에도 불구하고 만취했다. 숙취에서 깨어나면 분명 자동으로 아물었던 상처가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뒤로는 지로타치의 술을 받아마시지 못했다. 술에 대해서는 나중에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랑 약속했던 일을 하고 있을때 알았다. 지로타치가 술병을 들고 찾아오자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는 술도 적당히 좀 마시라고 다정히 충고하면서 검은 장갑을 낀 손가락을 내 눈구멍에 쑤셔넣고 안구를 끄집어내 지로타치의 술병에 넣어주었다. 수색이 이쁘니 이 잔으로 마셔야 한다면서 하얀 잔에 따르던 옅은 분홍색빛의 술. 내가 그에게 지불한 대가 중 일부는 분명 지로타치를 통해 내게 돌아왔을 것이다.

-무슨 일이 떠오르든 과거는 과거다. 어떤 고통을 겪었더라도 과거로 흘러가버리면 조금씩 끊임없이 바래어간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쓰든 그 때의 고통을 그대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마주볼수 없을 만큼 아픈 일은 말하고, 쓰고 나면 한번은 걸러져서 단조로운 사실만 남는다. 그렇게 하면 무서움이 조금씩 줄어간다. 전에는 떠올리기만 해도 무섭고 아팠는데. 그렇게 말하자 츠루마루가 경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생각을 할 정도의 뇌세포가 남아있냐면서. 휘두르는 주먹을 얄밉게 피하고선 웃으며 그러니까 뭐든 말하면 편해지는 법이라고 츠루마루는 내 옆으로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때다 싶어 잡아서 등짝을 후렸다.

-당연한 일들을 하나씩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자른 혀를 도로 붙여주겠다고 스테이플러를 찍던 히라노의 모습보다는 내 옆에서 계산이 틀렸다고 정중하게 정정해주는 히라노의 모습이 그보다 몇 배는 더 선명하고 밝게 떠오른다. 아주 천천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다.

-분명 앞으로는 대태도가 필요한 일이 있을 테니까, 조금 긍정적으로 고려해보기로 했다.

-간만에 마루에 꿇어앉아 손 들고 벌서는 남사가 있었다. 미카즈키가 이름까지 붙여서 냉장고에 넣어둔 롤케이크를 누가 먹었다고 낙담해있는 걸 보고 다들 자체적으로 범인을 색출해내더니 츠루마루로 범인이 좁혀지던 와중 양심에 찔린 우라시마가 자백해버린 것 같다. 오늘은 하치스카가 의뢰패 뒤에 '식욕에 지지 말고 진품의 품격을 지키자' 라고 써와서는 벌서는 우라시마의 목에 걸어주었다. 미카즈키에게는 내 푸딩을 줬다.

-남사들은 혼마루의 여러가지를 거덜낼 기세로 구슬을 모아오고 있다. 제법 모아뒀다고 생각한 금화를 탈탈 털어 돌격하는 기세에 눌려 안그래도 된다는 말은 못했다. 이제 2만개를 조금 넘게 모았다고 어딘지 내 눈치를 보듯 말하는 오오쿠리카라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공문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럴법도 하다. 남사들이 머뭇거리며 들고 온 검을 들고 도해실로 들어갔다. 그냥, 내가 문제일 것이다. 이제는 괜찮아진 일도 많지만, 다시 고개를 돌리고 외면해버리게 되는 일도 아직 많다. 오사후네의 검을 조용히 도해했다.

-미안합니다. 정말로 미안해요. 나는 아직 당신을 용서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오쿠리카라와 츠루마루가 안색을 살핀다. 미안하군. 역시 보상으로 주어지는 건 물건만 가지고 돌아오는게 좋았는데. 아냐. 괜찮아. 아는 사이니까 두고오기 힘들었겠지. 오히려 지금까지 나 생각해서 한번도 가져오지 않은 거잖아.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를. ...... 그렇게나 그 녀석에게 안좋은 기억이 많은 거냐. 고개를 저으려다가 끄덕였다. 말하면 편해진다고 말해놓고 번복하고 싶지는 않다.

-굳이 내가 당한 일을 말하는 것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닐거 같은데 왜들 들으려고 하는지. 그냥 당한 일 중에 하나만, 내가 싫어하는 음식과 함께 가르쳐주었다. 사족이지만 난 소시지가 제일 싫다.

-다음날 부엌에서 하세베가 오오쿠리카라와 츠루마루에게 영문도 모르고 혼나고 있었다. 겨우 말리고 소시지는 단도들 반찬으로 주면 된다고 둘을 달랬다. 하세베가 억울한 표정이기에 하세베도 달래주고 같이 식사준비를 했다. 이러라고 말해준게 아니었는데.

-뭐, 그정도나 말한 것도 엄청 대단한거 아닐까. 역시 나는 많이 나은거 같다. 나 스스로도 자랑스럽다. ......혼자 거울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던거 뿐인데 왜 하필 그 때 미카즈키가 지나간 걸까. 그래그래, 장하구나.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데 뭔가 진 기분이 든다.

-앞으로는 날 생각해서 도검을 두고 올 필요는 없다고 말해둔지 얼마 뒤 남사들이 큰 창을 가지고 왔다. 참 빨리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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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 혼마루(前) 2018. 11. 16. 11:35

※해당 연성은 도검난무의 2차 창작으로, 원작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블랙혼마루 등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설정을 다수 다루고 있습니다.

※과거묘사에 캐릭터 개악/헤이트 창작으로 보일 수 있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폭력 및 고어요소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리지널 사니와가 주인공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번외/시시오의 시점

-주인은 참 편하게도 산다. 물론 그걸 마냥 편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도검들은 여기에 없다. 나도, 다른 남사들도. 아무튼 부러지거나 차라리 그러는게 나았을 이전 주인들의 횡포를 다들 겪어왔다 보니 지금의 생활에 불만을 가진 도검은 아무도 없다. 그러면서 조금씩 나아진다. 우라시마는 아직 주인처럼 편식이 심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용궁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할아버지는...글쎄, 그거 문제일까? 우라시마도 말한 거지만, 할아버지 옆에 있으면 모기에 안 물려 좋은데. 본인은 개미 한마리도 죽이고 싶지 않은가 보다. 근데 그건 그것대로 문제 아닌가, 도검남사인데. 모르겠다. 이런건 주인이 해야 되는 고민이다.

-사실 주인은 좋은 사니와라고 하기는 조금 그렇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근데 그런데도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뭔지는 알고 있는 인간이라서 나는 용서했다. 사실 속은 기분도 든다. 남을 정화하면서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보여주는건 반칙이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너는 현현이나 해서 평범하게 잘 지내라 이거잖아! 자기가 무슨 동물원 사료처럼 쓰인 과거를 보여주면서 그래도 나는 너라면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웃음) 이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암튼 효과는...대단하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때리거나 벨 수 있냐고.

-주인이 옆에 있던 나를 돌아보더니 음, 나 이정도면 정말 멋있게 과거의 늪에서 벗어나고 있는거 같아. 라고 말했다. 정강이를 걷어차줬다. 과거의 늪에서 잘도 빠져나오셔서 잠자기 싫다고 11일이나 밤을 새며 할아버지를 정화했구나 하고 비아냥거려주자 내가 변했다고 슬픈 척이다. 보호해줄 생각은 들게 하던가, 쥐어박고 싶게 하던가 둘 중에 하나만 좀 했으면.

-전골파티 땐 깜짝 놀랐다. 그러고 한나절은 고기 생각도 안났었다. 묵은 상처가 대체 왜 터지는 건데...암튼 아파보이니 눕혔다. 주인이 쉬는동안 모두가 주인의 뒷담과 주인에 대한 의논을 했다. 그게 막 엉뚱한 쪽으로 대화가 튀더니 정신차렸을 땐 각자 하나씩 주인에게 바라는 것을 쓰고 있었다. 나중에 사니와 규칙리스트 같은 걸로 남긴다던가. 내 차례에 돌아온 종이를 읽어봤다.
나만 귀여워해줄것!
그대로 있어도 충분히 놀라우니까 제발 그대로 좀 있었으면
혼자 죽어도 상관없는건 나뿐이다, 너는 아니야.
주인을 보살피고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한숨이 나왔다. 뭔데 이게...하고 투덜거리며 다음순서에게 보여주자 탄식이 터져나왔다. 초기멤버들이 이상한 놈들밖에 없는거야 알긴 아는데 목적을 기억못하는 바보이기까지. 주인이 하지 않았으면, 해줬으면 하는 일을 쓰라니까.

-암튼 각자 겨우 리스트를 만들어 건넸다. 주인은 불만투성이인 얼굴로 너희들이 나한테 하면 안되는 일 리스트부터 만들어야 될거 아냐! 라고 항변했지만 우리는 그런게 없다, 존재할 수가 없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참견도 하지 말라니 진짜 건방지고 못된 데다가 멍청한 인간이다, 우리 주인은. 다음날 주인도 리스트를 뽑아와 건넸지만 우리가 지킬수 없는 규칙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더 바보라서 옆에서 잘 지켜야겠다.




(14)

새로 데려온 단도는 웃지 않는다. 말도 하지 않고, 무슨 말을 해도 대답도 하지 않는다. 원래라면 시끄러울 정도로 잘 웃고 잘 떠드는 성격일 텐데. 괜시리 저렇게 우울한 모습을 보면 나는 나대로 내 배를 가르고 폭죽을 쑤셔넣던 다른 혼마루의 저 아이가 생각나곤 한다. 아이러니하게 더 큰 일을 당할 뻔했던 나를 구해줬던 건 호타루마루였다. 뭐, 나를 위해서는 아니고 그냥 살 타는 냄새가 싫다며 아예 타는 부분을 날려줬을 뿐이지만...뭐, 그정도의 일이 한두번도 아니었고, 별 상관없지. 지금은 나는 됐고 저 애부터 어떻게 해주고 싶다. 산 채로 살육축제(무슨 축제인지 따로 기재돼 있던 주석은 일부러 무시했다)날 큰 모닥불에 던져져 타올랐다는데 아니 왜 불 트라우마가 없는 애한테도 그런걸 심어주고 난리인지. 덕분에 전문가도 아닌 나에게 언제나 고뇌거리가 밀려온다. 웃게 해주고 싶긴 한데.

"가만 보면 주인에게는 피학성향이 있는게 아닌가 싶어.""그런게 있을 리가 없잖아, 지금도 초기도 님의 막말에 마음이 부러져버릴 거 같은데."

카슈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러운 손길로 먹고 있던 과자를 뺏아 한쪽으로 치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음이 아프다.

"꼭 보면 어디서 주인 같은 애들만 데려오더라."
"네네, 그게 제 일이라서요. 나같은 도검 1호님. 요즘은 나 없이도 잠은 좀 잘 주무세요? 우쮸쮸쮸,"
"장난치지 좀 말고! 아무튼, 아이젠 쿠니토시에게 불 공포증이 있단거 자체는 우리가 평소에 불을 잘 안쓰니까 문제가 아닌데, 그게 주인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 아니야?"
"그거야 뭐...새삼스럽게 뭘 그런걸 이야기해. 여기 있는 애들 다 그렇다니까."

내가 당한 일과 너희가 당한 일은 언제나 비슷하다. 거울을 비춰보는 거 같아서 나는 언제나 마주본 거울 위로 일부러 입김을 불어 흐리게 하는 것처럼 매일을 보내고 있다.

"나도?"
"뭐야, 우리 사이에 다 이야기 끝난걸 새삼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이딴 걸로 얼버무리지 말란 것처럼 손을 쳐냈지만 조금 있다가 스스로 다시 내 손을 잡아 자기 머리위에 올리는 카슈였다. 카슈의 솔직한 점이 좋다.
카슈는 그렇지 않은가보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튼 친하게 지낼 거면 다같이 그렇게 해. 혼자 그러지 말고. 그리고 누구랑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근시 대동! 그게 꼭 나여야 한다고는 이야기 하지 않을 테니까."
"아직 아이젠에게 아무것도 못했으니까 벌써 그렇게 잔소리 하지 않아도..."
"제대로 대답해야지. 규칙규칙."
"에...혼마루의 사니와 된 자로서 도검과 언제나 의사소통은 진지하고 진실되게...?"
"아이고 잘했어요 우리 사니와님~"
역으로 쓰다듬받는 기분도 묘하긴 묘하다.



-아예 마음을 닫은 건지, 아이젠 쿠니토시는 내가 무엇을 해도 반응하지 않았다. 싫다고 발버둥치거나 무서워하거나 하는 거랑 무반응 중에 무엇이 더 상처가 되는지 이번 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냥 움직일 수 있는 인형을 앞에 두고 그 인형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평범한 아이젠 쿠니토시를 본 적이 없지만, 아무튼 이런 느낌은 이상하다. 심지어 내가 알고 있는 아이젠 쿠니토시도 적어도 나를 괴롭힐 때는 밝고 쾌활한 느낌이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무엇을 해도 무반응이었기에 돌봐주는게 힘들지 않았다는 것 정도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건 실례일까. 간만에 누군가의 옷을 갈아입히거나 밥을 떠먹여주게 되어 묘한 기분이었다.

-밤중에 한번은 깨워서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옷을 갈아입힌뒤 여전히 무표정이지만 불안한 기색이 엿보이는 것도 같은 아이젠을 달래선 같이 잤다. 어차피 간만에 이불 빨래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으니까. 그나저나, 이렇게 보니까 정말로 어린애같다. 조금씩 정신이 회복될 때까지는 아이라고 생각하고 돌봐야겠다.

-의외로 내가 할 일은 금방 또 거의 없어졌다. 미카즈키가 아이젠에게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기 옆에 앉혀놓고는 간식을 나눠주거나, 같이 손잡고 혼마루 정원을 한바퀴 빙 돌면서 산책을 하기도 하는게 어린아이를 본게 처음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우라시마나 카슈 정도면 어린이 라인에 넣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 혼마루에는 단도가 없었던 터라 외모까지 완전히 어린아이같은 도검남사는 이번에 온 아이젠이 유일하다. 미카즈키도 아직 누가 돌봐줘야 할 상황인데도. 괜히 보고 있으면 복잡한 기분이 들어서 간식을 가져다 미카즈키와 아이젠에게 나눠주었다.

-'그런데 왜 하필 아이젠 쿠니토시에요? 단도라면 구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정부에서도 그냥 갖다놓았지 여차하면 그냥 도해하는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래서 데려온 거야.'
'하긴. 원래 성격 그렇게 이상했죠. 괜히 힘들고 별 도움도 안되는것만 열심히 하고.'
담당자의 말을 들으면서 그러니까 지금 사니와같은 짓이나 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해주고 싶어졌다. 하지만 구하기 어렵지도 않고, 특출나지도 않지만 없는 것보다 나아 쓰는 거라면 우리 혼마루에 있는 다른 무엇인가와 많이 닮은거 같지 않은가. 영력이 특출나지도 않고 인물이 잘난 것도 아니지만 사니와 일은 할 수 있는 누군가랑. 괜히 마음이 무겁다.

-호타루마루를 데려올 수는 없지만 반딧불이라도 보여주면 어떨까 싶어서 밤의 혼마루에 반딧불을 풀어놓았다. 어두운 밤의 정원을 녹색 빛이 장난처럼 비춘다. 툇마루에 앉아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아이젠에게 겉옷을 덮어주었다.

-미카즈키에 이어 시시오가 아이젠에게 관심을 주기 시작했다. 자기에게 먼저 다가오지 않고, 자길 때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확인한 모양이었다. 아이젠에게 모피를 가지고 놀아도 좋다고 내미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말 소중히 여기는 물건이었을 텐데. 아이젠은 가만히 누에의 모피를 꼭 덮고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다른 도검들은 확실히 내가 새로 데려오는 도검들에게 관심도 많고, 기본적으로는 호감을 가지고 대하는 것 같다. 나로서는 정말 고마운 일이다.

-그걸 이제 알았느냐, 바보같은 녀석아.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이 바보니까 이제부터 바카마루 쿠니나가라고 불러도 괜찮아?
그러는 너야말로 그 쓸데없이 화려한 사니와명은 걷어치우고 제대로 바보라고 불리는게 나을지도.
그렇게 말하더니 하얀 학이 웃는다.
다들 네가 우리같은 녀석들만 모아다가 어떻게든 쓸만한 것으로 돌리려고 하는건 알고 있고, 우리는 주인에게 도움이 되고 싶을 뿐이니까.
도움이라.
그래, 네가 매번 기억에 지고 무서움에 지지 않게 말이지.

-꿈을 꿨다. 전 혼마루의 꿈이다. 사는 자들을 닮아 칼같이 부는 바람이 살을 에이고 조그만 우박이 떨어져내리는 혼마루에는 이전에도 꿨던 꿈이 이어져 있었다. 붉게 얼룩진 눈밭 한가운데 일직선으로 이어진 봄색 발자국을 또다시 따라간다. 여전히 모란꽃이 한가득 핀 나무가 반긴다. 나무 밑에 기대어 앉자 춥지 않았다. 올려다본 끝없이 흐린 하늘 너머로는 가느다랗게 달빛이 보일듯 말듯 하지만 구름이 겹겹이 끼어 아직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문득 내려다본 발치에는 하늘나리 꽃이 한 송이, 피안화가 한 송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따뜻한 향기에 눈을 떴다. 아직도 한참 어두운, 따스한 밤이었다.

-꿈은 기억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있을 때부터 최근까지 나는 언제나 다치고 베이고 잘리고 찢어지는 꿈만을 꿨기 때문이다. 그 꿈이 봄색으로 덧칠되는 것은, 나의 현재가, 지금 보내는 시간이 봄색으로 덧칠되어가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꿈 속에서 전 혼마루를 완전히 봄색으로 칠하는 날이 온다면 나는 그 때 여기 있는 남사들에게 만나고 싶어하는 모두를 데려다줄 수 있을 것이다. 아이젠 쿠니토시에게 호타루마루를 만나게 해주고, 오오쿠리카라와 츠루마루 쿠니나가에게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를 만나게 해줄 수 있겠지.슬퍼서 우는 건 아니다. 내게도 그 모든 것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질 날이 올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아마 한 송이의 꽃은 꽃말 때문에, 다른 한 송이의 꽃은 그 이미지 때문에 거기 있었을 것이다. 꽃말은 몰라서 찾아보았지만. 왜 그 두 꽃이 피었는지 알거 같았다.

-오늘의 근시는 하치스카였다. 표정이 밝아 보인다며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그런 말을 들은 건 이 혼마루에 오고 나서 처음이다. 조금 기뻤다. 하치스카랑 같이 오늘의 일정을 의논하여 출진과 원정을 보냈다. 다시 조용해졌다. 여전히 무표정하게 무릎을 감싸안고 있는 아이젠을 달래 세수를 시키고 밥을 먹였다. 전처럼 싫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어린이용 그림책 같은 거라도 좀 주문해서 보여주는게 정서안정에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물품 주문을 위해 인터넷을 하고 있자니 하치스카가 지나가듯 가볍게 정서 안정에 좋은 책이라면 주인을 위해서도 한권 정도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농을 걸어왔다. 이녀석이 정말.

-원정은 대성공이다. 카슈랑 우라시마가 도움패를 주워왔길래 오늘 간식으로 준비해둔 과자를 하나씩 더 주었다. 출진에서 돌아온 남사들한테도 부상이 없었으니까 잘한 거라고 과자를 하나씩 더 주었다. 그러고 나니 정작 내가 먹을 건 없길래 내색하지 않고 방으로 돌아가려던 차에 츠루마루에게 붙잡혀서 과자를 나눠받았다. 이번주의 업무 할당량은 끝나서 더 출진할 필요는 없어서 남사들이랑 같이 밭에 가서 감자를 캤다. 내일은 통감자 구이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자기 전에 아이젠이랑 시시오가 손을 잡고 방으로 찾아왔다. 같이 자자고 했기에 남는 이불을 가져다가 깔고 아이젠을 가운데 눕혀 나란히 잤다. 내천자를 그리며 자는게 꼭 가족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45분만에 잠들었다. 눈을 감고 찾아오는 무서움도, 금방이라도 결계를 쳐 막아내고 싶은 불안감도 천천히 희석되고 풀어져가는 모양이었다.내가 당신들을 구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나를 구해주는 것이다. 언제나 알고 있던 사실을 약간 더 따뜻하게 확인한다.

-며칠째 평온한 나날이 지나갔다. 출진횟수는 언제나 정해진 최소한으로 유지하고 있기에 할당횟수를 마친 주에는 남사들이 원하지 않는 한 출진을 보내지 않는다. 그 동안은 이불을 빨고 대청소를 하고, 상점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기도 한다. 그 며칠이 끝나갈 때쯤 아이젠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때 타버렸어야 했는데.'
그 말에 깊게 공감했다. 아이젠이 그랬어야 한다고 공감한게 아니라, 나도 스스로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어디선가에서 죽었어야 했다.
'나도. 카센이 죽었을 때 죽었어야 한다고 생각해.'
'......지금도? 당신은, 행복하게 살고 있잖아. 매일이 축제인 것처럼.'
행복해 보이는구나, 하고 안도했다. 입밖으로 꺼내 말하지는 않았다. 행복해도 괜찮을까. 나는 카센이 없는 여기에 있어도 괜찮을까.
'소중한 사람이 없는 세상은, 가끔 흑백으로 보여. 자기 피라도 흩뿌려 빨간색으로 보이는지 확인하고 싶을 정도로.'
'당신도 그렇구나.'
'너도 그랬구나.'
더 이상 해줄 말은 없었다. 아이젠도 약속처럼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 뒤로 아이젠은 여전히 말이 없고 웃지 않지만, 그 전의 불안정함은 많이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수리실은 출진에서 부상입은 남사를 치료하기보다는 엉뚱한 일에 더 많이 쓰인다. 오늘은 밤나무에서 떨어진 오오쿠리카라를 수리실에 밀어넣었다. 밤이 먹고 싶었다면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혼마루에 오븐을 들여놓기로 했다. 어차피 홈베이킹 수준이지만 간단한 간식 정도는 만들 수 있다. 큰 오븐을 사는게 한번에 여러명 분의 간식을 만들기 좋을 테지만, 나는 등을 떠밀리는 것이 두렵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데도 웃음소리와 오븐이 닫히는 소리는 여전히 기억에 선명하다.어떻게든 살아있기는 하지만, 아마 오래 구워지면 죽기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신체의 비밀을 그때 조금 알았다.

-쿠키는 돌덩이처럼 못생겼지만, 그럭저럭 맛은 있었다. 남사들이 치유력 말고는 장점이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다며 놀라워했다. 혼마루 내 기강이 이렇게나 심각하다.다 먹고 나서 쿠키틀을 새로 여러개 주문했다. 괜히 뭐든 돕고 싶어하던 남사들을 위해서였다. 다음날 쿠키를 구울 때 기웃거리던 남사들을 불러 반죽에 쿠키틀을 찍게 했다. 카슈가 매니큐어를 바른 손 모양 쿠키를 만들겠다고 야심차게 반죽에 데코를 했지만, 다 구워진 비쥬얼이 퉁퉁 부은 잘린 손목 같았기에 사진을 찍어 보존했다. 앞으로 놀려먹을 때 써야지.

-"현세엔 안 나와보네요?"
"아는 사람이 없어."
"왜 없어요, 나도 있고, 담당부서 사람들도 있고."
"너는 차라리 몰랐으면 싶고, 일적으로 만나는 사람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아."
"그런가요, 시설 사람들이나 대학 동기들 정도는 만나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 잊어버렸어. 이름도. 얼굴도."
여기밖에 없다.

-가끔씩 정말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고비에 몰렸을 때 기억이 사라질 때가 있었다. 당연히 그때는 모른다. 고통에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벌레처럼 꿈틀거리다가 천천히 나아가고, 다 나은 뒤에도 필요하지 않은 기억이기에 떠올리지 않고 있다가 그것을 떠올려야 할 때가 오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자주 웃던 친구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고, 좋아했던 여자아이가 떠오르지 않고, 보고 싶어서 꼭 품고 있던 친부모의 사진이 어떻게 됐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실제로 내 이야기는 아니라 예를 든 것이다. 정말로 잊어버렸다면 무엇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무엇을 떠올리지 못하는지도 말할 수 없다.그래서 사니와가 되기 전의 기억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전 혼마루의 일도 어떤 것은 플래시백될 때까지 아예 기억나지 않곤 하니 그것만은 다행스럽다.

-다만 도검들이 주인은 현세에서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봤을 때 대답을 해주지 못하는 것이 약간 미안하다.

-정기 출장일엔 어김없이 현세에 나가야 한다. 이번에는 이틀 정도 자리를 비우게 된다. 다른 도검들에게 아이젠을 부탁한 뒤 오오쿠리카라를 데리고 나갔다. 오오쿠리카라는 매우 양호한 상태이며 다른 혼마루의 학대를 받지 않은 평범한 다른 오오쿠리카라들과도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오오쿠리카라는 약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내 몸상태나 영력상태도 평소와 차이가 없다. 이번에도 다른 때보다 조금 기분이 좋아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정신상태도 약간 호전된 것 같다고 했다.검진을 받고 나서는 혼마루의 상태나 운영에 대한 질답을 했다. 도검의 수를 늘리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효율적인 운영이 가능할 거라는 충고를 들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적극적으로 도검의 수를 늘릴 생각은 없다.

-자유시간에 외출이 허가되었기에 오오쿠리카라에게 사복을 입히고 같이 밖으로 나갔다. 별로 할 일은 없고 그냥 필요한 물건 중 몇 개를 직접 보고 고르고 싶어서였다. 물건을 사는 동안 오오쿠리카라는 말없이 바구니를 들어주었다. 내가 한번 바구니를 떨어뜨렸기 때문이었다. 말은 오가지 않았다. 쇼핑이 끝나고 카페에서 음료를 사서 나왔다. 오오쿠리카라는 음료 위에 올라간 휘핑크림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주인이 가고 싶은 곳은 달리 없느냐고 묻기에 고개를 저었다. 기억나는 특별한 장소도, 특별히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다고 말했다. 오오쿠리카라는 무리짓고 싶은 생각도, 어울리고 싶은 생각도 없으나 그런 자신이라도 특별히 여기는 곳도, 특별히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몇백년을 살고 그 대부분이 의미없는 시간이었던 자신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다. 주인은 인간인데도 자신이 유래한 곳에 특별한 아무것도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알고 있는데. 오오쿠리카라가 약간 어색하게 느껴졌다. 나를 위한 말인 건 알지만.

-부탁받은 도검은 잔뜩 금가고 칼집도 더러워진 단도 두 자루였다. 잘 챙겨둔 뒤 담당자에게 작은 부탁을 했다. 그런건 제 업무가 아닌데요, 라고 밉살스럽게 대답하면서도 그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코우쨩의 사적인 일 같은거, 알아두면 그거 때문에 더 재밌어질 일이 많을거 같은데요. 라고 웃으면서. 정말 미운 놈이다.

-가지고 돌아가기 편하라고 두자루 다 단도를 고른 모양이었다. 아는 도검들끼리 같이 보내는 건 나쁜 일은 아니다.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도검들이라면 지금처럼 묶어서 한 세트로 다루는 것도 편한 일이고. 하지만 히라노 토시로가 전임의 사무도구와 문구용품을 가지고 내 몸 위에 창의성을 열심히 시험했던 것은 혼마루 보고일지에 안 썼었던가. 아니면 일부러 이러는 건가.서류를 읽어보았다. 마에다와 히라노는 쌍둥이같은 두 도검이라서, 두 도검의 전 혼마루의 사니와는 조금 특별한 쌍둥이같은 일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도중 실패로 그냥 각각 한 팔을 잘라낸 채 방치되었다고 한다.

-돌아오자마자 두 도검을 현현시켜 수리실로 밀어넣고 나는 수리가 끝날 때까지 방에 있었다. 커터날을 단 컴퍼스, 대형 스테이플러, 순간 접착제, 조각칼, 송곳, 압정. 여러가지 도구를 떠올리면서.전 혼마루의 기억 중 아와타구치의 별채에 잡혀있을 때가 떠올랐다. 등 위에 잔뜩, 잔뜩 메모지가 압정으로 고정된 채로 벽에 박혀서, 잘못된 방향으로 꺾인 발끝에는 호랑이가 두어마리 매달려 장난치듯 조금씩 살점을 까끌한 혀로 핥아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었다.

-두 도검의 방을 안내해주고 잘 돌봐주라고 도검들에게 부탁했다. 나는 조금만 더 쉬고 싶다.

-.......

-그렇게 심하게 찔린 것도 아닌데 너무 아프다. 이 혼마루에 와서 자해 말곤 칼침을 맞을 일이 없어서 내성이 없어진걸까. 사실 화가 나지 않느냐면 거짓말이다. 왜 또, 왜 여기서까지 나는, 왜, 아프고 고통스러워야 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했지만 본체를 두손으로 꼭 쥔채, 날에서 뚝뚝 떨어지고 흘러내리는 피로 손을 물들인 채로 눈의 초점도 제대로 맞지 않는 얼굴을 내게 향하고 있는, 떨고 있는 마에다를 보면서까지 화를 낼 수는 없었다. 현현을 되돌려 쉬게 한 뒤 하세베에게 부축되어 가는 내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픔은 분노와 원한을 낳는다. 누구라도 그렇게나 고통스러웠다면, 한번쯤은 부조리한 분노를 품을 수도 있다. 그게 그들에게 두번이, 세번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마에다와 히라노를 데려온 것이다.

-부조리하게 누구를 미워한 적이 내게도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딱히 이제 미워할 일도 원망할 일도 없다고 대답하겠다. 정정하자면,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었을 땐 그 누군가를 해칠 방도가 없었다. 그 혼마루에선 나를 지킬 힘조차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그게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나를 아프게 한 다른 남사를 해쳤다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무엇이 되어 있었겠지. 하지만 그게 나으려나. 그랬다면 카센은 죽지 않았으려나.

-멀쩡히 나았기에 밖으로 나갔다가 또다시 남사들에게 붙잡혔다. 괜찮다고 배를 까보인뒤 흉터 하나 없는 자리를 손으로 팡팡 쳐 보이고서야 겨우 놓여났다. 그와중에 숨이 멎을 뻔했다면서 그러지좀 말라고 꼬집어대는 카슈가 있었다.한쪽에 약간 떨어져 바라보는 히라노가 있길래 부르자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원래 몸이 튼튼하고 상처가 잘 아무는 몸이라 괜찮다고 안심시키기 위한 말을 꺼냈다. 마에다의 안위를 궁금해하는 히라노를 데리고 마에다를 둔 방에 와서 남은 재액을 처리하고 진정될때까지는 잠시 이 모습으로 둘 생각이라고 말해준뒤 생각해보니 미안해져서 사과했다. 히라노는 고개를 젓고, 형제의 불충을 대신 사과드린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

-새 식구가 들어온 기념으로 가볍게 파티를 했다. 히라노는 시종일관 얼떨떨해하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 케이크가 맛있었는지 잘라준 한조각을 남김없이 먹어주었다. 다행이다. 옆에서 나는 닭죽을 먹었다. 세상은 가끔 불공평하다. 나도 케이크.

-오늘의 근시는 카슈였다. 다들 출진나간 뒤 아이젠과 히라노도 데리고 밭에 같이 잡초를 뽑으러 갔다. 밭일도 제법 잘하잖아, 우리 주인. 그렇게 말하면서 카슈가 웃었다. 칭찬을 받는 건 오랫만이다. 일은 금방 끝나서 출진 전에 하세베가 싸준 도시락을 다같이 먹었다. 방울토마토가 가득 열려있어서 빨갛게 된 것만 골라 따왔다. 샐러드에 넣어야겠다.

-현세에서 연락이 왔다. 담당자는 전에 부탁한 것에 대해 말해주었다. 친부모로 추정되는 사람을 찾았지만, 이미 사망신고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예상은 했지만 현세와의 연결고리는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바깥으로 나가면 여전히 혼자. 뭔가 오오쿠리카라의 입버릇 같은 삶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그가 아니니까 혼자 살아간다는 생각만 해도 우울해진다.결국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겠지.

-우울한 티를 너무 냈는지 츠루마루가 신경을 써주었다. 물론 놀라움을 추구하는 츠루마루니까 신경을 써주는 게 오히려 심장에 나쁘다. 뭘로 복수해야 저 여유로운 도검이 놀라 자빠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다시 사니와의 업무로 돌아갔다. 제법 많이 깨져서 줄어든 도장을 다시 만들어서 나누어주고 도검들의 연도를 확인해서 적절할 거 같은 출진지를 정해둔다. 내번담당을 정하고 자원을 세어 기록했다. 검을 단도하지 않으니 남는 자원은 제법 많은 편이다. 누군가가 다쳐 돌아오더라도 꽤 여유롭지만, 다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자원을 세어 기록한 장부를 보고 히라노가 틀린 부분을 고쳐주었다. 아니...실수 정도야 누구나 할 수 있는 거고. 하지만 히라노는 이런 일에 능한가 보다. 덕분에 그동안 정리하지 못했던 일을 꽤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앞으로 서류관련 일을 도와주기로 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히라노와 머리를 맞대고 자원의 입수량과 지출을 계산하는 건 나쁘지 않았다.

-마에다의 상태는 아직 불안정했다. 하세베의 말로는 히라노보다는 안정된 거 같았다고 했는데. 차분히 대화를 나누어보았지만 여전히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본체를 모셔둔 방에도 느리게 옅은 재액이 끼고 있기에 주기적으로 정화해가며 대화중이다.

-히라노는 아직 내게 서먹서먹하다. 그래서 일부러 서류정리를 돕게 했다. 일이라는 칸막이를 사이에 두면, 조금 대화하기 편해진다. 마에다를 다시 현현시키면 조금 나아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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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 혼마루(前) 2018. 11. 16. 11:27

※해당 연성은 도검난무의 2차 창작으로, 원작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블랙혼마루 등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설정을 다수 다루고 있습니다.

※과거묘사에 캐릭터 개악/헤이트 창작으로 보일 수 있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폭력 및 고어요소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리지널 사니와가 주인공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미카즈키의 방을 준비해줬다. 뭔가 필요한 것은 없냐고 묻자 갑자기 미카즈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미카즈키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며 내가 정말 여기에 있어도 괜찮은 것이냐고 물어왔다. 그건 평소에 내가 다른 도검들에게 물어보고 싶던 말이다. 괜찮다고 달래는 데는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사실 따뜻한 차와, 같이 먹을 과자를 바로 내왔다면 금방 울음을 그쳤을 텐데.

-미카즈키는 이전 혼마루의 일을 잘 말하지 않기에 언제나처럼 부실한 서류로 대충 짐작했다. 짐작컨대 그 혼마루의 사니와는 미카즈키를 그릇으로 자기가 초래한 재앙을 한 곳에 모아 타타리가미를 만들고 저주로 구속해 사역하려고 한 것 같다. 비인도적인 데다 바보같은 짓이다. 실패로 끝난 뒤엔 미카즈키는 자신이 사니와에게 받은 저주에 더해, 몸에 묶어두고 있던 재앙까지 저주로 작용해서 우리 혼마루에 왔을 때처럼 되어 있었던 거 같다. 처음 건네받은 미카즈키를 기억한다. 눈구멍이 비어있고, 귀에 납이 채워져 있고 입이 꿰매져 있던 가장 아름다운 천하오검의 모습을.

-대부분의 경우, 나의 사소한 두려움보다는 그들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더 먼저 고개를 들고 울음을 터뜨린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에게는 아직 6년전과 비교해 변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도검들은 새로 들어온 식구에게 바로 다가가지는 않는다. 해당 도검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이 있는 남사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기억이 진정될 때까지 심호흡을 하고 거리를 두고, 그렇지 않은 남사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간다. 고슴도치들을 모아놓은 큰 사육장과도 같다. 다만 미카즈키는 그런 경계심도 안좋은 기억도 없는지 누구를 보더라도 웃으면서 바로 다가간다, 거리를 두면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나는 미카즈키가 혼마루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시작한지 이틀째 조용히 미카즈키를 불러서 코코아랑 쿠키를 먹이면서 내가 당신을 피한 것은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라고 해명해야 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이었지만 미카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이 갈색 차는 무엇인고? 하고도 물어봤다. 제법 맘에 든 모양이니 다음엔 코코아에 마시멜로를 넣어 줘야겠다.

-미카즈키는 살아있는 것에 닿는 것을 정말로 좋아한다. 아니, 도검남사의 본분적인 의미가 아니라 평범한 애호의 의미다. 현현하고 여기에 오기 전까지 봤던 것이라고는 죽은 것과 썩은 것, 움직이지 않게 된 것 뿐이라 하니 이해는 간다. 하지만 흐뭇하게 혼자 있는 오오쿠리카라를 자꾸 건드려서 나한테 민원이 들어오게 하는 일만은 삼가줬으면 한다. 곤란해하는 나를 보고 하세베가 어차피 주군은 하는 일도 없고 시간보내는 방법도 잘 모르는 잉여인력이니 미카즈키를 돌봐주는건 어떠냐고 말했다. '사니와에게 해서는 안되는 일' 리스트를 빨리 만들어서 공표하고야 말 것이다.

-업무 외적인 물건에 지출이 너무 많다고 콘노스케가 한 마디 했다. 식비로 퉁치라고 대응했다. 간식도 분명 식비에 포함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항변하자 영 떨떠름한 기색의 콘노스케에게 네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는 내가 화과자를 사서 미카즈키에게 주었기에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더니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저 속물 여우. 그렇게 말하고 콘노스케가 사라지자마자 복슬복슬이는 어디 갔느냐고 미카즈키가 두리번거리며 들어왔다. 애완동물을 길러도 좋은지 문의해볼까.

-나는 살이 찐게 아니라 그냥 군것질을 하면서 5년간 잃어버린 몸무게를 조금 되찾았을 뿐이다. 군것질은 도검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수단이지, 내가 즐기기 위한 것이...아주 아닌 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주 목적은 아니다. 그런데도 다들 너무하다. 하치스카가 코테츠의 주인으로서 품격을 가져주면 안 되겠느냐고 조곤조곤하게 설교를 하고 우라시마가 옆에서 같이 운동해줄 테니까 살 빼자고 천진하게 웃고 있는게 조금 상처다. 그렇게 쪘나. 그 와중에 주인은 체질이 그 모양이니까 의외로 근육도 잘 붙는거 아닐까 하며 뭘 생각하는지 눈을 빛내는 카슈가 무섭다. 그런데 같이 군것질한 녀석들은 왜 살이 안 찌는 거지. 조금 더 포동해진 카슈나 츠루마루나 오오쿠리카라도 괜찮지 않을까. 나도 마주 놀려줄 수 있는데.

-혼마루는 매일 조용하다. 정해진 일과를 매일 반복하고 있다. 정상적인 혼마루라면 이게 맞지 않을까. 출진을 나가는 남사들은 천천히 연도를 올리고 있고, 원정을 나간 남사들은 선물이라고 자원을 가지고 돌아온다. 나는 혼마루에 남아있는 다른 도검들이랑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나씩 해보고 있다. 며칠 전엔 남아있던 카슈와 우라시마랑 같이 만두를 만들어서 돌아온 녀석들이랑 저녁에 같이 쪄먹었다.

-미카즈키의 상태와 호전과정을 상세히 적어 보고하라는 상부 명령이다. 블랙 혼마루에 희생된 다른 남사들의 케이스에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하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겠지...호전과정을 쓸 때는 머뭇거렸다. 미카즈키는 아직 완전히 호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당에 쪼그려앉아 줄지어 기어가는 개미를 바라보던 미카즈키가 손을 뻗는 순간 개미들이 그대로 죽어버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많이 약화된 저주지만 아직도 매우 작은 생물에게는 유효하다. 미카즈키가 콘노스케를 자꾸 만져보는 것은 자신이 만져도 죽지 않는 생물에 대한 기쁨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뭐 콘노스케는 생물이 아니지만. 지금 상태로는 콘노스케 정도 크기의 생물에게는 그냥 조금 몸상태가 안좋아지는 정도로밖에 적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처음에 애완동물을 안겨주려고 한 시도는 그래서 그만두고 대신 말에게 건초를 주는 일을 전담시켰다. 나중에 내가 몰래 가서 말을 돌봐주면 되니까. 다른 도검들은 딱히 아무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무서워하거나 할 줄 알았는데. 우라시마가 그거 엄청 유용한 능력 아니야? 여름 되면 불빛에 벌레도 많이 꼬이는데, 할아버지가 옆에 있으면 벌레도 다 잡을 수 있겠네? 모기도 안 물리고? 좋잖아! 하면서 반가워하고 있다. 미카즈키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지 난처하게 웃고 있었다. 여름으로 계절을 바꿀 생각은 없긴 한데.

-한 1년 전쯤부터 깨닫게 된 건데, 영력을 지나치게 쓰면 반동으로 차오르는게 느려진다. 그때면 다른 사람들처럼 상처를 입어도 자연적으로 낫지 않는 몸이 되고 가끔은 다 나았을 터인 매우 오래된 상처가 터지기도 한다. 이것은 혹시라도 오해를 받을까봐 다른 도검들에게도 말해둔 사실이다. 그래도 모처럼 다들 모여서 전골을 먹는 자리에서 그렇게 된 건 미안했다. 그래서 숨기고 내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바깥 출입을 금지당해서 지루하다. 아니, 툭 건드리면 죽을 중환자도 아닌데 복도 밖으로도 못 나가는건 너무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동안 남은 서류를 작성했다. 이때다 싶어서 평소에 못 적었던 간식을 잔뜩 적어서 하세베에게 내밀었다. 평소라면 하세베의 손에서 무참하게 저지당했을 요구가 웬일로 받아들여진 건 배에 둘둘 두르고 있는 붕대 덕분일 것이다. 만세. 간식은 나 때문에 이리 된 것이냐고 눈물을 그렁거리며 문병와서 앉아있던 미카즈키에게 대부분 건네주었다.

-도검들이 문 바깥에 모여 웅성거리길래 할 말이 있으면 들어오라고 하자 카슈가 혼자 들어왔다. 나머지 도검들은 밖에 서있었다. 카슈가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혼마루의 사니와로서 지켜야 할 규칙' 이라는 글자가 맨 윗줄에 이쁘게 정자로 쓰여 있었다. 이런건 내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비겁하게! 내용은 평범하다. 영력을 계획없이 사채처럼 끌어쓰지 말 것/편식하지 말 것/몸을 아끼고 날붙이를 몸에 대지 않을 것/목을 매달지 말 것/하루에 8시간씩 잘 것 등등 갈수록 뭘 원하는 거냐 싶은 내용들이었는데 안 지킬시 자기들이 자진해 도해실로 들어가겠다는 소리에 식겁해선 결국 지장을 찍었다.

-몸 상태는 안정됐다. 이제는 별로 아프지 않고 묵은 상처가 터지지도 않는다. 영력도 안정화돼서 웬만큼 다쳐도 금방 나을 수 있을 것이다. 한번쯤 깊게 찔러 시험해보는게 마음 편한데 그럴려다가 하치스카에게 딱 걸려서 또 벌을 섰다. 아, 남사들이 내놓았던 사니와가 지켜야 할 규칙은 한번 어기면 그날 간식이 없고, 세번 어기면 자유로운 일상이 없다. 기껏 아이스크림까지 사다 놓았더니 내 몫이 없는게 슬픈 일이다. 그것도 억울한데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두고 우라시마랑 하치스카는 여유롭게 초콜릿 맛이 더 맛있는가, 바닐라 맛이 더 맛있는가에 대한 유유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나쁜 녀석들, 나중에 혼자 현세로 돌아가면 파르페를 먹으러 갈 것이다.

-그러고 보니 주인, 이름을 불러도 좋겠는가? 지나가는 말처럼 츠루마루가 가볍게 말했다. 카슈에게도 가르쳐준 사니와명이니 딱히 츠루마루에게 가르쳐주지 못할 것은 없었다. 이름을 말해주자 츠루마루는 몇번 정도 이름을 반복해서 불러보더니 살짝 미간을 좁혔다. 어울리지도 않는 거창한 이름인데 줄여불러 보는 것은 어떠하냐고 웃는데 그러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을까 하고 정말로 무심하게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부드러운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렇게만 부르지 않으면 상관없지.
뭐라고 부를 건데, 그래서?
짧게 이렇게 부르면 어떠하느냐. 렌이라고.
언제나 그렇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은 바람을 무시하고 다가온다. 나를 그렇게 부르던 목소리가 딱 하나 있었다. 순간 울컥하는 것을 참았다. 눈물도, 오열도, 아직 버리지 못한 마음도. 겨우 울지 않고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미안. 그건 안돼. 다른 식으로 불러도 좋으니까, 그건.그 말에 츠루마루는 그답지 않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라도, 너를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그때는 그 마음에 들어가도 좋다는 뜻이겠지. 그 전까지는 네 뜻을 따르마.

-연못을 새로 단장했다. 대부분은 비단잉어를 풀어놓는 것에 불만이 없어 보였지만, 카슈와 츠루마루는 뚱하게 새로 단장한 연못을 보다가 각자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연꽃을 보고 기억해내는 것이 싫으니까 뽑아버렸는데, 둘다 알기 쉽고 곤란하게 화를 내는 타입이다.

-정기검진일이다. 현세에 나가야 한다. 언제나 절찬리에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녀석을 데려가는게 좋겠다 생각했다가 카슈랑 싸우는 시시오를 발견했다. 오늘은 저 녀석이다.

-본체를 내가 맡아두지 않았다면 인명사고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시시오를 달래주느라 햄버거를 사 먹였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패스트푸드 점이라면 딱히 고기를 먹을 필요가 없어서 나도 편하다. 아, 시시오의 상태는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다. 그냥 나 한정으로 조금 유해졌을 뿐이다. 그 병적인 호전성이 어서 나았으면. 아, 나는 멀쩡하다, 아마도. 몸상태는 양호하다. 정신상태는 프라이버시이므로 말하지 않겠다. 영력의 상태에 대해서는 가벼운 상담 후 재측정결과를 통보해주겠다고 했다.

-이 혼마루에 와서 중상을 입은 남사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케비이시가 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출진장소도 제대로 체크하지 않은 내 잘못이다. 하세베를 수리실에 밀어넣은 뒤 경위서를 따로 작성했다. 반성회에서 내일부터는 직접 출진과 원정을 맡아 지시하겠다고 했다가 칭찬받았다. 카슈가 드디어 주인이 일을 하네, 하면서 기특하다는 듯 앉아있던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오오쿠리카라도 왠지 미지근한 눈빛을 보내고 있다. 잠깐만, 난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 혼마루에 와서 언제나 열심히 일하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만. 이놈들이 정말.

-혼자서 못 자서 카슈가 몇번이고 옆에서 같이 누워주곤 했는데 그게 언제부턴가 해괴망측한 로테이션으로 바뀌어 있다. 물론 끼고 싶지 않아하는 애들은 같이 누워서 자진 않지만 대신 불침번을 선다. 이건 이것대로 고통스럽다. 혼자서 좀 편하게 자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생각을 바꿨다. 그 날은 미카즈키랑 같이 잔 날이었다. 목이 말라 눈을 떴는데 고통스러운 얼굴로 눈을 감은채 움직이지도 못하는 미카즈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당황해서 손을 잡고 천천히 영력을 불어넣자 조금씩 얼굴이 편안해진다. 다시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는, 아직 상처가 덜 가신 검. 그냥 조금 불편해도 같이 아픔을 나누는게 좋겠지.

-한 삼일 정도 시도해서 날씨를 늦봄쯤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좀 덥지만, 여름 비스무레한 것 기분을 내보고 싶었다. 불평불만은 수박과 참외, 복숭아로 잠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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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 혼마루(前) 2018. 11. 16. 11:24

※해당 연성은 도검난무의 2차 창작으로, 원작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블랙혼마루 등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설정을 다수 다루고 있습니다.

※과거묘사에 캐릭터 개악/헤이트 창작으로 보일 수 있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폭력 및 고어요소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리지널 사니와가 주인공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세베는 고기를 못 먹으니 이렇게라도, 라며 자주 생선요리를 했다. 나와 우라시마에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도해실에 향을 피우러 들어갔다. 카센의 칼집에 모란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언제 두고 간 것인지, 꽃잎의 끝이 약간 갈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꽃을 가지고 나와 방에 있는 꽃병에 꽂았다. 출진 결과를 보고하러 들어오던 츠루마루가 그것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서로 감싸주되 건드리지 않는다, 가 아니었던가.

-츠루마루와 사흘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들 의아해하고 걱정스러워했지만 이건 둘만의, 매우 중대하고 큰 문제다. 츠루마루도 나만 보면 흥, 하고 고개를 돌려버리는게 약이 올라서 나흘째부터는 식음을 전폐했다. 츠루마루가 고개를 숙이기 전에 카슈와 오오쿠리카라에게 혼났다. 그날 저녁은 좋아하는 감자조림이랑 밥을 먹었다. 제대로 화해하지 않으면 내일은 소시지볶음을 올릴 거라는 하세베의 협박에 츠루마루랑 화해하기로 했다. 하세베는 취미가 나쁘다.

-왜 그랬냐고 물었다. 볼이 퉁퉁 부은 표정으로 츠루마루는 나를 원망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네가 미츠타다를 데려오기 무서워하는 것도, 호타루마루를 무서워하는 것도 다 존중하고 납득하고 있어. 하지만 그건 어째서인가. 칼집을 버리지조차 못하고 남겨둔 그리움이라면 왜 다시 보고 싶어하지 않는거지.
그런 이야기를 왜 이제 와서 하는 거야.
나에게는 중요한 이야기거든, 사니와. 제대로 묻지. 카센 카네사다를 데려오거나 현현시킬 생각은 없나?
일언반구의 가치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나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도해실에 이불과 베개를 갖다놓았다가 하세베에게 혼났다. 그래도 몰래 도해실에 갔다. 거기서 혼자 잘 거다. 이건 나와 츠루마루와의 기나긴 투쟁의 시작이다.

-네 결계는 구멍이 숭숭 뚫려서 그걸로 깨도 거를수 있겠더구나. 하고 츠루마루가 비웃었다. 이불을 덮어줘서 고맙다고 해야 되는지 결계를 친 장본인도 모르게 결계를 찢고 들어와 한 이불을 덮고 잔 것에 화를 내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이 이불에 돌돌 말려 본채로 끌려왔다. 늦잠을 자서, 훈계는 점심 밥상머리에서 듣게 되었다. 가뜩이나 넘기기 힘든 가라아게가 목구멍에 걸린 것 같다. 점심 식단은 분명히 일부러다. 하세베가 안보는 사이 잽싸게 남은 가라아게를 시시오에게 패스했다. 오오쿠리카라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츠루마루는 슬쩍 옆에서 조용히 밥만 먹다가 왜 거기 있는 줄 알았으면 안 데려왔느냐고 같이 혼났다.

-잘 들어. 츠루마루 쿠니나가. 네가 무슨 생각으로 물었는지 모르겠는데 혼마루에 어떤 도검을 두느냐는 내가 정해.
그런것 치고는 정부의 기분나쁜 아이가 꽤나 관여하더만.
그건 그거고.
아무튼 그래서 카센 카네사다는 안 데려와. 혹시 출진에서 데려와도 현현시키지 않고 도해할 테니까 그런 줄 알아.
기분나빠하려나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입을 툭 내밀고 있었다.
제대로 마무리를 짓지 않으면 나도 손댈 수가 없지 않느냐. 비겁한 녀석.
츠루마루는 그렇게 말하고선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나가버렸다.

-카슈가 츠루마루랑 대련을 가장한 진검승부를 벌여 둘다 중상을 입었길래 나란히 수리실에 집어넣었다. 도움패도 자원도 남으니까 바로 회복시켰다. 그동안 너무 수리실을 노려보고 있었나. 다른 도검들이 내 눈치를 살피고 있다. 수리실에서 나온 두 말썽꾸러기한테 마굿간 당번을 시켰다. 왜 싸웠는지 물어봐도 대답 안하길래 내일 내가 하려고 했던 거지만 말똥까지 치우게 했다.

-사요를 다른 곳으로 보내기로 했다. 얼마 전에 이케다야에서 사요를 잃고 비탄에 잠긴 사니와에게 가게 된다고 했다. 거기에는 코우세츠 사몬지도 있고, 그 집 둘째도 있다고 하니까 그곳에 가서 행복했으면 한다. 사요가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기에 팔거나 하는게 아니라고 다독인 뒤에 나는 너에게 가족을 줄 수 없으니까, 라고 말해주었다. 사요가 몰래 곁눈질로 우라시마랑 하치스카를 보고 있던 것은 나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 하지만 나는 아직 우리 혼마루에 사몬지 형제 세명이 모이도록 해줄 수가 없으니까. 사요는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주인이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사람 정도는 베어주고 떠나도 좋았을 텐데. 라면서 고개를 숙였다. 미워하는 사람. 없었을걸. 아마. 있었을까? 나는 그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 부분의 기억만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혼란스럽다. 살을 파고드는 칼날이 분명 원망스러웠던 시절이 있었을 텐데. 필요없는 생각을 깊은 곳에 처넣는다. 마지막으로 사요 앞에 무릎을 꿇고 안아준 뒤에 보냈다. 조그만 아이는 두 손 한가득 곶감이랑 과자가 든 보따리를 들고 몇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같이 있어줬으면 하지만 조금 더 제대로 된 곳으로 가서 지냈으면 하니까. 전의 혼마루를 떠올렸다. 사요의 마른 팔 안에 한가득 간식을 안겨주고 싶었다.

-하치스카랑 많이 친해졌다. 이전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처음엔 거북해서 계속 피해다니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대화를 원하는 하치스카랑 대화하고 나서는 그럭저럭 많이 친해진 편이다. 배가 갈린 이야기만 빼고 다 했더니 그렇게 심하게 괴롭힘당했다면 나라도 그렇겠지, 라면서 이해한다고 말해준 덕에 오히려 조금 덜 거북해졌다. 하치스카는 정직하고, 성실하고 좋은 성격이었다. 비뚤어진 곳도 구부러진 곳도 없어서 대체 왜 블랙혼마루 출신 케어 리스트에 올라있던 건지를 알 수 없었다. 의외로 그 이유는 며칠 뒤에 알게 됐는데, 우라시마와 하치스카랑 같이 차를 마시다가 우라시마가 무심코 나가소네의 이야기를 꺼내게 됐을 때였다. 하치스카는 부드럽게 웃으며 좋은 분이지, 존경하는 형님이다. 그렇게 말했다. 얘가 미쳤나.

-제발 관련서류에는 자세한 사항을 적어줬으면 좋겠다. 실실 웃는 담당자를 닦달해 들은 이야기로는 자신을 돕고 부러진 나가소네 때문에 한참이나 정신이 망가져 있다가 겨우 제정신을 차렸지만 나가소네에게 가지고 있던 여러 감정이 뒤엉키고 부서진 덕에 지금의 하치스카는 나가소네를 친형인 진품 코테츠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한다. 우라시마는 딱히 고칠 필요 없을 거라고 우기는데 고쳐야 하나 이 착각을.

-"요즘 편하게 잘 지내지요?"
"야 너 그만좀 아..."
"싫으면 이제 슬슬 다른 사니와들이 하는대로 단도도 하고 검도 주워오시던가요. 그렇게 편의를 봐주는데 왜 자꾸 기어올라요. 아, 이거 내 발언 아닙니다. 상사가 한 소리니까 그냥 얌전히 받아가세요."
"아 진짜......리스트는?"
"없어요. 이번엔 지정이네요. 귀한 검이니까 반드시 잘 돌봐주시기. 시중받는거 좋아하는 검이니까 잘해줘야 됩니다~."
수화기를 떨어뜨렸다.

-미카즈키 무네치카한테 심한 짓을 당한 적은 없다. 어차피 그 혼마루에서 나한테 칼을 안댄 도검을 세는게 더 빠르지만. 심한 짓이라는건 그의 형제도가 나한테 그랬듯 척추랑 가죽 한겹으로 겨우 이어진 두동강난 반주검을 만드는 거라던가, 아니면 아와타구치의 협차가 그랬듯 말똥이 가득찬 구덩이에 던져넣고 흙을 덮는다던가, 그도 아니면 아와타구치의 다른 단도가 그랬듯 호치키스로 잘린 혀를 붙여주겠다며 빽빽하게 찍어버리던가, 그런 정도의 일을 말하는 거다. 미카즈키는 그저 단순히 나를 보면 보기 싫다고 별채로 돌아갈 것을 권했고, 내가 그 권유를 받아들일수 없을 경우 다른 검들처럼 나를 베었을 뿐이다. 문제는 없지, 없지만. 그저 나는 미카즈키를 보고 반사적으로 녹색의 관복을 떠올릴 뿐이다.

-미카즈키 무네치카를 현현시킨지 사흘이 지났다. 흰 기모노만 입고 독방에 앉아있는 그에게는 미안함이 있지만, 정화는 본분이 아닌지라 잘 하지 못한다. 정화가 끝날 때까지만 참아주기를 바란다.

-이틀이 더 지났다. 미카즈키 무네치카는 이제 말할 수 있다. 저주는 거는 것보다 해주가 더 힘들다. 나같이 정화가 서툰 사니와라면 더욱 그럴것이다. 내 몸이었으면 저주에 걸린 부위를 잘라서 재생시키는 게 더 빠르다. 도검의 치유는 자신있으니 미카즈키 무네치카에게도 그 방법은 유효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도검에게 상해를 입힐 수는 없다.

-긴 꿈을 꿨다. 푸른색의 옷자락이 보였다. 기억에 있는 장면이다. 다친 미카즈키를 치료해주려고 다가간 순간. 휘두름이 느리고 파괴력이 강한 만큼, 중간에 멈추지는 않는 무거운 타격은 베어내는 것보단 타격으로 찢고 부수는 것에 가까웠다. 쓰러졌다. 가슴 아래가 거의 사라졌다. 부서진 등뼈로만 이어져 있다. 노기를 띈 신검이 다가온다. 발 아래로 고깃조각을 하나하나 눌러밟으며. 버둥거리지조차 못하고 그저, 의식이 흐려져간다.

-가위에 눌린 모양이었다. 식은땀과 함께 일어나니 해가 지고 있었다. 당황해서 미카즈키 무네치카의 방으로 갔다. 미카즈키는 지친 표정으로 웃으면서 닷새나 밤을 새었다면 어쩔수 없지. 어제는 잘 쉬었느냐, 라고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쉽다.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이런게 무서워서 일부러 잠을 안 자고 있었던 거였는데.

-부엌에서 증거물을 찾아내고 간이 혼마루 재판을 열었다. 애시당초 우리 혼마루의 도검들은 나를, 사니와라는 직책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다. 계획자인 하세베와 실행자인 시시오에게 내일 혼마루 전체 대청소형을 내렸다. '사니와에게 해서는 안될 일' 리스트를 만들어야겠다. 주인이 지금은 쓰지 않는 수면제를 멋대로 가져다가 불온한 일에 쓰는 것도 그중 하나이다.

-다시 정화를 속행. 7일째다. 새하얀 벽의 작은 얼룩이 멋대로 뒤틀어지고 번져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잠시 세수를 하고 와서 정화를 계속했다. 잠이 들면 나는 또 땅에 피랑 내장을 쏟고 가운데 토막이 거의 산산조각난 잔해가 되어 있을 것만 같아 잘 수 없다. 그저 미카즈키를 정화한다. 어두운 독방에는 이제야 한 쌍의 초승달이 가늘게 뜬다.

-또 공백이 생겼다. 이번엔 이틀이다. 마지막 기억은 밥을 먹으라고 오오쿠리카라가 그릇이 올려진 쟁반을 가지고 들어온 순간이었다. 그리고는 그가 잠시 내 등뒤로 돌아온 뒤의 기억이 없다. 수면제를 감췄더니 이러기인가. 오오쿠리카라에게 혼자 밭일형을 내렸다. 모처럼 넓힌 밭의 혹독함을 혼자 맛보라지. 그런데 은근히 좋아하는거 같아서 별로 벌이 되는것 같지도 않다.

-미카즈키가 독방 밖으로 나올수 있게 됐다. 저주는 거의 3/4 이상을 풀어냈다. 앞으로는 자연스레 혼마루 내에서도 천천히 그 악의와 독기가 바래고 사라져갈 테니 정화에 굳이 연연하지는 않아도 된다.

-잠을 자지 않은 지 다시 7일째다. 미카즈키는 혼마루 안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정화라고 핑계대기도 힘들다. 그냥 영력이 떨어져 힘들다는 핑계를 대고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카슈가 매끼 식사를 가져다주었지만 입에 대지 않았다.

-11일. 약속했으니까 자해는 하지 않는다. 다만 잠이 올때 허벅지를 찌르는 정도는 누구나가 다 하는 거잖아? 아...그런데 이젠 더 찌를 데가 없네. 구멍투성이잖아.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허벅지를 찔렀던 송곳을 뺏겼다. 이번엔 정말 모두 보는 앞에서 맨궁둥이를 맞아야 하는가 했는데 츠루마루가 뭐라고 하는 것보다 카슈가 울면서 나를 끌어안는게 더 빨랐다. 그리고 억지로 자리에 눕혀졌다. 다른 도검들이 다 나가고 나서도 카슈는 나가지 않았다.
가서 자.
여기서 자도 돼.
내가 안된다고 하면?
주인은 내가 잠을 못잘 때 팔베개를 해줬잖아. ...... 썩어가는 내장을 덮어야만 잠을 허가받았던 내가, 지금 이렇게 매일 편하게 잘 수 있게 됐는데. 주인이 잠을 못 자는건 말도 안되니까. ...... 무서운 꿈을 꾸지 않게, 주인을 지켜줄께. 첫번째가 아니라도 초기도라고?

-네일팁 1000세트를 만드는 꿈을 꿨다. 아니, 악몽은 아니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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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나무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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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 혼마루(前) 2018. 11. 16. 11:17

※해당 연성은 도검난무의 2차 창작으로, 원작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블랙혼마루 등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설정을 다수 다루고 있습니다.

※과거묘사에 캐릭터 개악/헤이트 창작으로 보일 수 있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폭력 및 고어요소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리지널 사니와가 주인공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안 들킬줄 알았는데. 하세베가 빨랫감을 정리하다가 옷이 한벌 비는걸 발견하고 추궁하는 것을 옆에서 우라시마가 그만 제풀에 사니와가 피묻은 옷을 입고 있었다고 자백한 모양이었다. 츠루마루가 어디서 곧게 잘 뻗은 나뭇가지를 주워왔고 아무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아서 나는 츠루마루 앞에 종아리를 걷고 서야했다.
몇번 찔렀지?
하...한번...
웃기지 말고.
한...열다섯번 정도...
그래. 그럼 열다섯대. 한대마다 다시는 몸에 칼을 찌르지 않겠습니다, 라고 크게 말하기.
어릴때도 맞고 자란 적은 없었던거 같은데, 하물며 내가 주인인데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끝내 열다섯 대를 맞을 때까지 아무도 안 말려줬다. 다행히 가만히 있으면 아픔은 바로 낫고 회초리 자국도 사라지지만 이 마음의 아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창피하다. 츠루마루는 다음에 또 자해하다가 걸리면 다 모인 앞에서 알궁둥이를 때리겠다고 했다.

-종아리가 아직 쓰라려서 옷을 내릴 수가 없다.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으니 사요가 슬쩍 다가왔다. 얼음주머니랑 이쁘게 익은 주황색 감이 놓인 쟁반이었다. 사요는 얼음주머니를 종아리 위에 올려주고는 감을 집어들어 깎기 시작했다.
아프지. 그 질문에 웃었다. 안아플 리가 없잖아. 그래도 잘못한건 아니 할 말이 없다. 내가 그냥 고개만 가로로 내젓자 사요는 이쁘게 깎은 감을 접시에 놓으면서 말했다.
걱정시키는 복수야, 그러니까 할말 없지.
감은 달았다. 하나 둘 집어들어 엎드린채 먹으며 사요에게도 같이 먹자고 했다. 사요는 감을 오물거리면서 엎드린 나를 내려다본다. 왠지 '사요' 랑은 뭔가 나눠먹는 일이 많구나. 아무 말 없이 감 씹는 소리만 들린다. 그걸로 편하다.

-아무튼 좋은 쪽으로 해결됐다. 우라시마는 자주 웃고 잘 떠들게 됐다. 내가 바란대로 하치스카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즐겁게 이야기도 나누고 가끔 형에게 장난을 치다가 안아프게 딱밤을 맞기도 한다. 하치스카의 경우야 당한 학대강도는 센 편이었지만 원래 자존심이 강하고 잘 꺾이지 않는 검이니까. 괜찮을 거다.
다시 혼마루는 조용해졌다. 카슈는 근시도 좋지만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심심하다고 하길래 연도가 높은 편인 코테츠 형제랑 같이 원정을 보내주었다. 당분간 심심하다는 소리는 안 나오겠지. 대신 츠루마루를 근시로 뒀다가 후회했다. 계속 뒤끝있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가시방석에 앉은거 같다.
안한다니까, 이제.
네가 빈소리를 하는게 한두번이냐, 놀라게 하는 것도 한두번이어야지.
그렇게 내가 자해하는게 싫어? 어차피 바로 낫잖아.
그러면 빈혈로 쓰러지지나 말던가. 그리고 너야말로 내가 내 몸을 해할 때는 뭐라고 했느냐.
그거야 뭐...
대충 대답하지 말거라, 그 때는 무슨 마음으로 말렸느냐.

-그거야 당연히 내 검이니까, 카슈가 그랬고 오오쿠리카라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말할까 했는데 말문이 막혔다. 츠루마루는 내가 이 혼마루에 와서 처음으로 스스로 선택해서 데려온 검이다. 매일 실없이 장난을 치고 그러면서도 채 못 벗어난 아픔을 아픔으로 씻고, 그러는 주제에 내가 아픈지 안 아픈지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항상 곁눈으로 살피고 있던 검이었다. 그래서 나는 츠루마루에게 약간은 가족같은 기분을 품었던거 같다.
아빠같기도 하고 형 같기도 한. 마치, 카센 같기도 한. 이 말만은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지만.
내가 더 이상 말을 않고 있자 츠루마루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더 캐묻고 싶지 않은듯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나 나나 서로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같은거 같으니.
응?
그런데도 너는 툭하면 자길 소중히 하지 않으니 어쩌겠느냐, 너의 검인 내가 너로부터 너를 지켜줘야지.
뭐라고 하는 거야, 대체...
곁에 두거라. 그래주는 한 나는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또한 너에게도 상처 하나 나지 않도록 하마.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왜 얼굴만 뜨거운 건지. 분명 츠루마루가 낯뜨거운 소리를 해서 그렇다.

-츠루마루가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덥다. 계절을 바꿔볼까 생각했지만 심어놓은 작물을 생각하니 그럴수는 없고, 나는 계절을 세심하게 바꾸지를 못하니 그냥 혼자 마루에 걸터앉았다. 아무도 오지 말아달라는 분위기를 팍팍 내면서 앉아있으니 바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왜지. 배가 아프냐고 얼굴을 가까이 하는 우라시마에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어보였다. 우라시마는 다행이다. 주인이 아프면 나도 왠지 기분좋지는 않을거 같아서, 라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그 혼마루에서 처음으로 나를 공격하지 않던 도검, 여긴 항상 춥다고 웃으면서 투덜거리던 얼굴. 그 우라시마는 아니지만, 이제서야 약속을 지켰다.
봄빛 배경에서 우라시마가 웃고 있었다.

-오랫만에 꿈을 꿨다. 꿈은 언제나 전 혼마루의 꿈이다. 당연히 좋은 꿈 같은건 하나도 없어야 했는데. 눈이 내리는 어두운 혼마루의 마당, 혼자 서있는 내 앞으로 아무도 없는 눈 위에 발자국이 찍힌다. 새잎과 꽃잎으로 가득한 봄색 발자국이 하나 둘씩, 따라오라는 듯 앞으로. 조용히 향기가 나는 발자국을 따라간다. 바람한점 없이 고요한 곳. 발자국은 시든 나무 앞에서 멈추더니 나무를 한바퀴 돌았다. 그 봄색이 나무에 옮겨붙더니 한가득 꽃을 피웠다. 그 나뭇가지에는 어째선지, 벚나무인데도 그리운 모란이 한가득. 꿈은 거기서 끝났다.

-그 꿈이 나의 지옥이었으면 좋겠다. 나를 내려다보는 당신의 꽃으로 가득한 지옥.

-도검들이 써낸 필요물품 리스트를 검사했다. 카슈의 젤네일 키트에 대해서 조금 고민해봐야겠다. 그리고 안쓰는 것, 굳은 것은 좀 정리해서 버리라고 말했는데도. 그 외에는 대체로 양호한 물건이었다. 아니, 잠깐만. 정정하자. 정말이지. 모란 모종은 뭐야. 일단 츠루마루랑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

-도해실 옆에 전별의 꽃을 심고 싶어서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웃는 츠루마루한테 박치기를 하고 방으로 들어와버렸다. 이건 분명 나에 대한 시위다. 그것도 매우 사악하고 비열한 시위다. 내가 도해실에 무엇을 두고 있는지 알면서 도해실 옆에 꽃을 심으려 하는 것인가. 그것도 하필이면. 츠루마루의 희망리스트만 빼고 일단 다 신청했다. 전투/원정의 기록은 착실히 보고하고 있어서 급료에 무리는 없다. 흥, 나중에 실망하는 얼굴을 보고 웃어줄테다.

-사요는 가끔 우라시마와 하치스카가 같이 있는 것을 말없이 잠시 바라보곤 한다. 코우세츠 사몬지라면 데려올 수도 있을거 같은데, 한번 고려해볼까. 사실은 사몬지형제들에 대해 떠올리기만 해도 자동으로 연상작용이 일어나버려서 무섭지만. 아니면, 사요가 원한다면 다른 좋은 혼마루에 보내줄수 있어도 좋을거 같다. 어느 쪽이든 성급하게 이야기할 것은 아니니까 조금 더 생각해보자.

-토마토가 많아서 갈아서 쥬스를 만들었다. 믹서기가 없으니 손으로 일일이 가는 것도 중노동이다. 도중에 보다못한 카슈가 나를 한쪽에 앉혀놓고 자기가 마저 토마토를 갈았다. 깜짝 놀랐다. 다친건 실수였고 카슈한테 힘든 일을 시키긴 싫었는데. 다들 맛있게 먹어주었다. 나랑 카슈는 한쪽에서 남은 토마토를 잘라 먹었다. 강판은 괜찮냐고 물으니 주인보다는 내가 더 잘쓸걸, 하고만 대답했다. 카슈가 사소한건 금방 잊어주는 타입이면 좋겠다. 강판은 자주 쓰인 적도 없었으니까 별 문제없지만 이렇게 말하면 혼나겠지.

-주방에는 있으면 유용한 몇가지가 없다. 사실 굳이 필요한 물건들도 아니다. 불을 보고 싶지 않아 인덕션을 놓았고, 대체할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걸로 대용한다. 가끔 오븐이 있다면 빵을 구울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그걸 살 만한 마음의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다. 오븐을 보고 생살 타는 냄새가 아닌 빵 냄새를 떠올릴수 있을 때쯤에는 사도 좋을 테니까, 미리 돈을 조금씩 모으고 있지만

-재미로 솜사탕기계를 사왔다. 의외로 코테츠 형제들이 좋아했다. 아닌척 동그랗게 이쁜 솜사탕을 만들어서 뿌듯해하고 있는 하치스카를 옆에서 츠루마루가 살살 놀리고 있었다. 다음날 기계가 망가졌다. 물을 넣으면 어떤 모양으로 나올지 궁금했다고 말하는 츠루마루의 귀를 카슈가 잡아 끌고가서는 복도에 벌을 세웠다.

-그곳의 주방은 정말 크고 넓었다. 필요한 모든 주방도구가 갖춰져 있었고 그것으로 음식과 음식이 아닌 것을 손질했다. 매일 깨끗하게 청소한대도 피비린내가 떨어져나가지 않을 정도로 그 곳의 전임자는 '요리'를 좋아했다고 한다. 아마 전 혼마루의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는 전임자에게서 요리를 배웠을 것이다. 살을 저미는 솜씨가 훌륭했으니까. 그 혼마루에서 나는 음식다운 음식을 먹기 힘들었고 결국 미츠타다와 기분나쁜 거래를 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생명의 은인이긴 하다. 후유증은...고기가 싫어진 것 빼고는 그럭저럭 나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주방일을 자진해서 했다. 더 들쑤시고 헤집다 보면 고통이 느껴지지 않고 당연한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어서였다. 지금은 십중팔구 주방에 들어가면 밀려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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