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인이 그 전에 있던 곳에선, 얼마나 오래 있었지?
그 질문에 나는 살짝 고민하다가 그냥 6년이라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츠루마루가 인상을 썼다.
그런 곳에서?
그 질문에 나는 그냥 담담히 대답했다.
너희도 사니와가 치유해주는 이상 부서지지 못했잖아. 그냥 나도 그거뿐이야.
그렇게 말하며 그 6년간의 흔적을 더듬었다.
-23세. 세상에 내던져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때 이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보수도 좋고, 자격도 되는 일이라고. 그보다 좋았던건 누군가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곁에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인간이 아닌 무엇인가라도 있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쪽이 좋았다. 그렇게 나는 스카웃에 응해 사니와가 되었고 혼마루에 발령나기 전에 초기도를 고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전임자가 있던 혼마루이고, 그 혼마루에 없는 검을 가져가는 것이 좋을 거라는 추천에 카센 카네사다를 고르게 되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모르겠다. 아무튼, 온화했다. 그와 함께라는 게 믿음직할 정도로.
-그리고 카센과 함께 게이트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카센과 떨어졌다. 낯선 수많은 사람들의 손에 잡혀 카센이 나와 떨어져 어디론가 끌려가버리고, 혼자 남은 내 앞에는 검은 정장에 안대를 한 남자가 서있었다.
또 인간이로구나.
듣기 좋은 낮고 다정한 어조의 목소리로 그는 내게 말했었다.
네게 원한은 없지만, 우리에게도 사정이 있어서 말이지. 아무튼 만나서 반가워. 사니와 군. 화풀이용 인형에게 사니와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몇개인가의 호의를 받고 그 몇백배의 악의를 받는다. 추운 겨울이 떠나지 않는 혼마루에서 몇번이고 그 추위와 재액 낀 땅위로 피를 쏟는다. 그래도 나는 본채를 끊임없이 드나들고 단도실을 헤집고 부엌을 기웃거렸다. 어딘가에 있을 나의 초기도를 찾아다녔다. 그때쯤 영력에 이상이 생겼다. 나름 남들보다 우수했던 영력이 자동적으로 자기치유를 가장 우선시해서 사용된다. 정화해야 할 것들을 앞에 두고 깊이 베인 상처가 자동으로 치유되고 절단된 손가락이 재생되게 된다. 살아남는 데만 좋았다. 그렇게 겨우겨우 조금씩, 재액 부스러기를 떨쳐내는 정도로만 매일 조금씩 혼마루를 정화하며 나는 카센을 찾았다.
-카센을 찾은 것은 3년이 지나서였다. 본채 한구석에 있던 빈방. 여러 남사들의 결계와 주박, 밧줄과 족쇄, 눈가리개등으로 손끝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재액에 둘러싸인 카센. 그럼에도 3년전에 잠시 같이 있었을 뿐인 내 목소리에 카센은 웃는다. 매화가 먼 길을 날아가는 것과 같이 너도 내 곁을 찾아주는구나. 그 동안 잘 지냈니? 고통같은건 모르는 척 마냥 평온하게 시를 읊는 듯한 목소리로. 나는 그 목소리에 혼마루에 와서 처음으로 울었다.
-결계를 풀 힘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신 매일 그 방으로 몰래 카센을 찾았다. 그 방으로 가는 길의 모든 것을 조금씩 정화해가며, 다른 도검들의 눈에 띄어 그 소위 '화풀이' 를 당하고서 도망쳐 카센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회복한 뒤 카센을 찾아간다. 재액덩어리가 된 카센을 겨우 조금씩 정화하면서 오늘도 무사히 잘 지냈다고만 이야기한다. 눈이 가려져도 알 수 있는 거짓말을 그저 묵묵히 들어주는 카센과. 그 거짓말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나.
-카센을 구해낸 것은 그것을 2년정도 반복한 뒤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두꺼운 결계에 갑옷도 뚫는다는 단도를 틀어박아 틈을 만들고 결계를 깨게 도와준 것은 아츠시 토시로였다. 그 이유는 한참 뒤에 알았다. 카센이 뒤집어쓴 수많은 재액이 다른 도검들에게 씌어있었던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화풀잇감이었던 것처럼 카센은 나가시비나였다.
-재액을 다 떨쳐내지 못한 카센을 데리고 다니며 나도 점점 그 재액이 달라붙는 것을 느꼈다.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도검들의 공격은 이제 카센에게까지 향했고 연도가 낮은 카센이 부서지는 것만은 막기 위해 몇번이고 몸을 던져 막고, 몰래 카센을 하코다테에 보내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연도를 올리면 부서지는 것만은 피할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매일 모두와 싸우며 또 1년을 보냈다.눌러 베는 것만으로 선반과 함께 사람까지 베어버린다는 그 명도가 카센에게 내리꽂히던 그 날까지.
-......
-아츠시가 영 개운하지 않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뜨고 나서 나는 카센에게 묶여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풀어헤쳤다. 도검남사의 영력이 깃든 밧줄에 손이 닿을 때마다 손바닥이 타들어간다. 상관없었다. 최대한 손에 영력을 둘러 밧줄을 풀어내렸다. 손이 떨려서 몇번이나 밧줄을 놓친다. 그제서야 기억난 조그만 커터칼로 밧줄을 정신없이 끊었다. 조각난 밧줄이 땅으로, 핏방울과 함께 떨어졌다. 겨우 팔을 자유롭게 하고 나서야 눈을 가리고 있는 검은 눈가리개를 풀었다. 그러고 나서야 갑자기 밝아지면 눈에 무리가 클지도 모른다는게 생각나 한 손으로 대신 카센의 눈을 가렸다. 아차. 다친 손이었다. 카센은 가만히 있다가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힘겹게 들어올려 나를 안았다. 듣기 좋던 부드러운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손을 치워주지 않겠니, 네 얼굴을 보고 싶구나.
지금은 안돼, 그보다 다친곳은,
다친 곳이라면 내 눈꺼풀에 닿아 있는 상처 하나를 알고 있단다. 어쩌다 이렇게 다쳤니.
그 정도는 금방 낫는데도, 그 상처 하나가 그저 안타깝다는 듯이 카센은 손 위로 손을 겹치며 말했다.
-여전히 황량한 곳이구나, 흐르는 계절을 즐길 수도 없이.
별채에 돌아오고 겨우 어느정도 회복시킨 뒤에야 카센은 바깥을 내다보며 말했다. 아직 카센의 몸상태는 만전이 아니다. 상처는 모두 치유했지만 재액의 정화는 내 특기가 더이상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남사들이 액받이로 사용해 털어낸 수많은 재액을 뒤집어쓴 채로 카센은 아무렇지 않다는듯 웃었다.
하긴, 풍류를 즐기기에는 나 또한 말도 안되는 몰골이지만.
미안해, 카센.
네가 정화해주지 않았다면 타타리가미가 되는 것도 촌각이었는데, 무엇을 미안해하는지 원. 괜찮단다. 책망은 그만두지 않겠니.
-나는 노사다의 한자루 검, 카센 카네사다라 하는 자. 주인의 곁에서 피안까지 함께할 테니 곁에 두어주렴.
그 말이 너무나 무겁고 기뻤다.
-원래도 내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유일하게 잠시 손에 있었던, 곁에 있었던 카센과 헤어지고 다시 아무것도 없이 보냈다. 나에게는 정말로 카센밖에 없었다. 그것을 숨겼어야 했지만 내게는 그럴 여유도 배려심도 없었을 것이다. 언동 하나하나에 그 마음은 배어나오고 카센을 헤매게 만들었겠지. 내게 향하는 상냥함에 매달려, 카센을 정으로 묶어버린 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카센을 마음에 담았을 것이다. 유일하게 나를 위해준 가족과도 같고, 친구와도 같은 내가 가장 사랑하던 상대.
-이름은 함부로 가르쳐주는 게 아니란다. 원, 어찌 이리도 경계심이 없는지.
왜냐고 되묻는 나에게 카센이 카미카쿠시가 뭔지 가르쳐주었다. 사실 별 문제 없지 않나 하고 긴장감없이 생각했다. 상대가 카센인데 무슨 문제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자 카센은 웃었다.
바보같은 소리를 하지 말거라. 아직도 재액에 오염된 내가 너를 데려간들 타타리가미의 신역에서 네가 행복할 리가 있니.
그렇구나. 그러면, 내가 카센을 다 정화해내면 그때는 데려가줄거야?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려무나. 하지만 생각 정도는 해볼까.
그렇게 이야기하며 카센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 때까지는 아무도 네 이름을 모르도록, 네 이름이 저 바보들의 손에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야겠다며 붓을 들었다. 그날 나는 사니와로서의 이름을 얻었다.
-처음으로 카센이 나에게 화를 냈다. 억지로 카센의 재액을 내가 나눠 몸에 받았기 때문이었다. 내 정화능력은 약하고, 그것이 카센을 파먹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괜찮다, 몸이 무너진다면 베어자르고 재생시켜서라도 버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화내는 카센을 마주 노려보았다.
내 곁에서 피안까지 함께 한다고 했지? 동감이야. 그런데 나는 아직 그 피안이라는 데 가기는 한참 멀었으니까, 카센이 먼저 가버리는거 싫어.......같이 있어줘. 뭐든 할 테니까.
카센은 그 말에 한숨을 쉬면서 나를 품에 안았다.
-......
-그럴듯해보이는 미봉책들 뿐이다. 하루하루를 그저 죽지 않고, 부서지지 않고 넘기기 위한 임기응변뿐. 카센에게 입을 맞춘 것은 영력을 사용해서 재액을 걷어 내 몸으로 끌어올 힘도 없어서 직접 신체접촉을 통해 재액을 넘겨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행위에 부수적으로 행복해졌다는 사실은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상처의 회복이 늦다. 영력이 고갈되었다가 차오르는 시간도 덩달아 길어지고 있다.
-미다레 토시로에게 오른팔을 당했다. 과다출혈로 기절했다. 겨우 깨어났을 때는 회복되어 있었지만, 영력이 고갈된 동안 끊어진 힘줄까지 다 고쳐지진 않았다.
-도검들의 공격이 나보다 카센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상처는 전보다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걸로 지킬수 있으면 그걸로 괜찮다. 누군가가 비웃었다. 그렇게 지키다가 네 앞에서 깨지면 정말 재미있는 일이겠구나.
나도 카센도 어차피, 끝은 예감하고 있다. 우리는 그저 서로가 하루라도 더 오래 무사하기를, 아니. 살아남기를 바래서 서로 기대고 서 있는게 전부였다.
-더 일찍 올 수도 있었던 끝은 그제서야 가장 원하지 않는 형태로 찾아왔다.
-그곳이 어디였더라도 너와 떨어지는 곳이라면 나는 행복했을 텐데.
(2)
-보고서보다 심한데. 전 사니와는 분명 조금씩 정화해가고 있다고 했을텐데.
아예 시도하지도 않은건 아니었나 본데.
재액으로 인해 무겁고 끈적거리는 분위기가 잔뜩 감도는 혼마루였다. 인수담당자는 옆에서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치스카 코테츠와 자신을 중심으로 재액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결계를 쳤다. 그리고 혼마루를 계속 둘러보았다. 확실히 군데군데 조금씩, 다른 곳보다는 재액의 불길함이 옅은 곳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6년동안 한 사니와가 해낸 정화라기에는 너무도 보잘것없다.
다른 도검들에게 물어보면 알겠지. 일단 일을 시작해볼까. 그렇게 말하며 인수담당자는 당분간 신이 내리고, 올라갈 곳으로 쓰기로 한 별채를 향해 축사를 읊으며 한 걸음씩 걸었다. 정화하지 않으면 드나들 만한 곳이 아니다.
-신의 말석이라 하여도, 재앙을 몸에 둘렀다 하더라도 본분은 신이기에 함부로 할 수는 없다. 파괴는 최후의 수단으로 두고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그 원통함을 씻어 보내는 일이다. 본령으로 되돌려보낸다면, 그 전에 그 원한을, 미움을 조금이라도 씻어주어야 한다. 전임 사니와가 카센과 단둘이 살았다는 폐허나 다름없는 별채를 정화하고 카미다나를 만든다. 본체를 놓을 좌대를 마련한 뒤 신을 진좌시키기 위해 찾아나선다.
-상처가 심했다. 연못가에 앉아있는 큰 체격의 남사를 찾아 다가가자 그는 바로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카락이 귀가 쫑긋거리듯 살랑거렸다. 곧,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다.
주인님께서는 떠나셨습니까.
살가운 태도다. 전 사니와는 중태로 병원에 이송된 상태이기에, 어떤 남사에게 어떤 짓을 얼마나 당했는지는 알 수 없다. 눈 앞의 도검남사가 얼마나 미쳐있는지도 직접 대화로 들을 수밖에 없다.
너희들 덕분에. 치유력은 대단한거 같으니까 아마 치료받고, 무사히 나을거야. 죽는거 못 봐서 아쉽겠네?
비아냥을 담아 말하자 코기츠네마루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반대입니다만. 아무도 주인님이 죽길 바란 적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분이 필요했으니까요.
어떤 의미로?
미움만으로 가득 차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그 미움을 풀어낼 상대는 필요했으니까요.
-기억을 더듬었다. 아마 그것을 완전히 죽여버리려 하던 이시키리마루를 말렸을 때도 같은 생각이었다. 치료받은 미카즈키를 산죠의 별채로 돌려보내고, 진노한 신검을 말렸을 때도 그렇게 말했다. 그 온화한 신검이 분노와 미움에 가득차서 스스로를 잃는 모습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지만, 정말 재앙 덩어리 같은 것으로 변하면 곤란하니까.이시키리마루를 돌려보내고 나서 피와 내장으로 질척거리는 땅을 밟고 걸어가 간신히 사람 형체만은 유지하고 있는, 상체와 하체가 척추와 가죽, 내장으로 겨우 연결되어 있는 사니와를 내려다보고 웃었다.
이래서야 재생은 느리겠군요. 혹시 죽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게 말하며 맥을 짚었다. 그 와중에도 약하게나마 맥박이 규칙적으로 뛴다. 코기츠네마루는 웃었다.
다행입니다. 조금 더, 같이 춤추지 않겠습니까?
이 닫혀버린 신역, 길을 잃고 헤매 들어온 소중한 존재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요리시로. 그들의 고통과 미움을 받아주려면, 아직 부서지면 안된다.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지만, 다른 남사들만큼 주인님과 자주 어울리지는 못한 편이라. 원하는 대답을 해드리지 못해 죄송하군요.
인수담당자는 무표정하게 그 말을 들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들 또한 가엾게 여겨 진혼하는 것이 의무이지만 인간인 이상 어려운 일이다. 코기츠네마루의 이야기에 감상을 말하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원한다면, 다른 곳으로 가게 해줄까? 그 곳에서 이딴 짓을 하지 않을 거라면 최대한 손을 써볼게. 더 이상 인간과 어울리고 싶지 않다면 그 재앙을 떨어내고 원한을 씻어 진혼해주고.
-주인에게 보이기 위해 털결을 다듬는 것도, 야생으로 지내는 것도 이미 질릴대로 질린지라, 가능하다면 공양받아도 좋겠습니까. 다 씻어내고 싶군요.
지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코기츠네마루를 보고 인수담당자는 철칙을 떠올렸다. 가해자로서 꾸짖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또한 아픈곳이 있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조용히 손을 내밀자 손위에는 한 자루의 태도가 얹혀졌다. 남자의 장신은 빛무리처럼 사라져버렸다. 코기츠네마루의 본체는 그가 이 혼마루에 있는 동안은 임시로 만든 신역에서 공양하다가, 모든 일이 끝나면 제대로 절차를 밟아 공양을 마치고 깨끗하게 본령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해할 예정이다. 겨우 하나가 끝났다. 신이 46주나 모여있는 곳. 앞으로 한참이나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한다. 다시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최대한 설득하여 본체를 확보해야 하며, 파괴는 최후의 수단으로 되도록 피한다. 사실 전투능력이나 도검을 제압할 힘도 없는 인수담당자이지만.
-전임자가 6년이나 여기서 살아남은 것은, 도검들이 원한을 풀 대상으로서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하긴, 자체 치유력만 뛰어난 사니와가 재액이 가득한 공간에서 마흔 여섯개의 적의를 받고 살아남는다는것 자체가 무리다.하지만, 사니와는 왜 지금까지 한번도 보고서에 제대로 상황을 적어서 제출하지 않은 걸까.
-아와타구치의 별채를 찾아가는 길은 알기 쉬웠다. 피묻은 돌길을 따라가면 됐다. 피투성이의 무엇인가가 질질 끌려간 자국이 몇개나 어지럽게 겹쳐져 있다. 그리고 나온 넓은 별채는 지독했다. 독기와 악취에 물들어 있다. 썩은 살점에서 나오는 악취와 재액, 독기가 별채의 입구를 지옥문처럼 보이게 한다. 손수건을 꺼내 따라오던 하치스카에게 건네주고, 자신도 옷자락으로 코를 막으며 인수담당자는 호신결계를 강화시키고 들어갔다. 별채의 방 중 한쪽의 작은 방 안에서 인수담당자는 히라노 토시로를 찾아냈다. 검붉은 것이 잔뜩 묻은 잡동사니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어린아이의 몸을 본 순간 그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설득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주군께서는, 돌아가셨습니까?
응.
어떻게 할까요. 전 주군께서는 매일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셨는데.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을 필요는 없다. 벽을 바라보자 가장 위쪽에는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라고 단정히 쓰여진 하얀 종이가 붙어있었고 그 밑으로 보이는 것은 표본용 실침으로 줄줄이 꽂혀있는 썩은 안구와 늘어져내린 시신경. 그 밑에 라벨지를 붙여 적어둔 적출일자가 보였다.
주군께서 언제나 숙제를 봐주셨는데 말이에요. 오늘은 어...음...아! 기억났어요, 오늘은 마에다랑 같이 해부실험을 한 날이니까 복습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군께서 안 계시네요, 어디로 가셨나요?
숙제를...봐주셨다고?
매일 잘 잊어버리셔서, 그럴 때는 이치고 형님이 데려다주셨지만요.
어디서부터 망가졌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인수담당자는 히라노에게 다가가서 손을 잡고 조심스레 영력을 불어넣었다. 임의로 현현을 풀어 본체로 돌아가게 하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전투력이 없으니 이런 거라도 있어야겠지. 피투성이 단도를 집어올리며 인수담당자는 정말로 원한깊은 검이라고 느꼈다. 옛날엔 아마 이런 검을 요도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피냄새가 짙은 검이다. 오래오래, 진심으로 기도를 올릴 수밖에 없다.
-별채로 돌아와 코기츠네마루와 히라노 토시로를 두고 향을 피웠다. 축사를 읊고 한참이고 정화를 하며 기도해야 했다.
-간략한 대화록을 작성했다. 이시키리마루에게 치명상을 입은 적이 있는 것으로 추측됨. 히라노 토시로에게 육체적 학대를 당함.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녹차 티백을 우린 보온병을 들고 다시 나갔다. 차를 좋아하는 도검을 만나러 갈 테니까 변변찮더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우구이스마루는 종이컵에 따른 녹차를 흔쾌히 받아들여 마셨다. 차를 마셔본지도 오래됐구나, 라면서 알 수 없는 눈으로 종이컵 바닥을 내려다본다. 적당히 우려낸 찻물 속에는 당연히 찻잎 같은건 떠있지도 않다.
-그 아이에게? 행위의 유무를 묻는건 어리석지 않겠나, 우리들 중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않은 자가 훨씬 더 적을텐데. 얼버무리다니, 당치도 않은 말을. 그러면 확실히 하는 것이 좋겠군. 나는 그 아이의 허벅지 근육을 끊어버린 적이 있다고. 인간의 몸으로 그런 치유력이라니, 놀랍더군. 미움이라. 인간다운 이야기를 하는군. 그 아이는 밉지 않았어. 그저 그 아이보다 먼저 온 아이가 가르쳐줬지. 인간을 베기 위해 만들어진 검이 생명을 소중히 하라던가, 싸우는건 좋아하지 않는다던가 헛소리라고. 해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다른 검에게 날을 세우고, 서로 부딪쳐 이가 나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그러면서 나의 검이 되어 모든 것을 해치라고. 그 아이의 말이 맞더구나. 살을 찌르고 근육을 휘젓는 것은 차를 마시는 것만큼이나 기분이 좋아.
우구이스마루가 든 종이컵 안에서 잔물결이 동심원을 그리고 있었다.
-우구이스마루: 전임에게 강도높은 세뇌를 받은 것으로 보임. 가학성과 호전성이 매우 강하다. 바로 다른 혼마루로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본체 입수 후 진혼절차를 거쳐 도해결정. 대화로 얻어낸 것은 그리 많지 않으나 전임자의 초기도를 파괴한 것이 헤시키리 하세베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보고서. (중략)전임자의 초기도는 카센 카네사다. 초기 보고서에 도검들에게 초기도를 빼앗겼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 뒤로 초기도에 대한 서술은 없다(후략)
-여기서 손에 넣은 검들을 가지고 돌아가면 신사에 둔 검이 세자릿수를 넘게 되겠다. 이래서야 요도 신사라는 오명을 지울 수가 없겠지. 그저 사연이 있는 신들을 달래고 있을 뿐인데. 다행스레 그리 상처가 깊지 않고 비교적 멀쩡한 검들은 다른 혼마루로 보낼 수 있었다. 매우 드물게, 정화와 정신적 치료를 위해 정부의 시설로 보내지는 도검도 있다. 아키타 토시로를 다른 혼마루로 보내줄 때, 아키타는 불안한 시선으로 주인님은 잘 계시겠지요? 라고 물어왔다. 고개를 끄덕이자 다행이라고, 정말로 안도하며 웃는 아키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임자는 모두에게 괴롭힘당하기만 한 것은 아닌가 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인수담당자는 찬물로 몇번이나 얼굴을 때리듯 거칠게 세수를 했다. 이입하지 말고, 제삼자의 이야기를 중간에 서서 듣듯, 소설을 읽듯. 몇번이고 중얼거리는 그의 옆에서 하치스카가 수건을 건네주었다. 조금 쉬지 그래. 담담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하치스카에게 인수담당자는 살짝 고맙다고 고개를 숙여보인뒤 곧 고개를 저었다.
일은 많고, 나는 세명밖에 들어주지 못했어. 그보다, 현세에서 연락은 있었어?
병원에 있던 전 사니와가 병원에서 자해를 시도했다고 하더군. 사람들이 저지했다지만, 그러지 않더라도 본인이 스스로 자살하는건 힘든 체질이 됐을 거라고 해.
그렇군...무엇인가, 그에게 도움이 될 거라도 얻는다면 가지고 돌아가야겠어. 아차, 이건 못들은 걸로 해주겠어?
하치스카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두 손을 들어 귀를 막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저 베었을 뿐이지 뭐, 우리야 무기잖아?
주인을 베고도 검이라고 할 수 있냐던가, 그런 말은 하지 않겠지만. 하지만 검이 주인의 손에 쥐여지지 않고도 검이냐고 지적은 해도 좋을까.
그것을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우리는 당연히 그 손에 쥐어진 것도 아니었어. 애초에 그것이 제대로 우리의 주인이었던 적이나 있었냐고. 시끄럽네 정말.
귀라도 찔러버리면 네 잔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텐데, 라고 투덜거리면서 도다누키 마사쿠니는 바위에 걸터앉은 채 인수담당자를 불만스러운듯 흘깃 바라보고선 다시 손에 쥐고 있는 자신의 본체를 내려다보았다. 언제라도 공격해올지 모르기에 얇은 방어결계를 몇겹이고 중첩해서 주변에 쳐두고 있었지만 그걸 아는지 아직까지는 칼을 휘두를 기색이 없다.
처음부터 우리는 정했었어. 그 빌어먹을 옛날 주인을 베고 나서, 새로 오는 것이 무엇이든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주인으로 모셨던 적도 없어.
......주인이 아니라면 바로 베어버리면 됐을 것을.
용도가 확실했거든. 다른 녀석들에게 못 들었나? 그것이 있었으니까 네가 다른 녀석들하고 대화라도 할 수 있는 거야, 우리가 아팠던 만큼 다른 무엇인가를 해치고 나서야 안도하는 거지, 아, 벨 수 있다. 우리는 그래도 아직 칼이다, 아직 무엇인가를 상처입히는 것이 즐겁다. 옛 주인놈에게 배운 유일한 거야. ......신 같은 게 아니다, 그저 도구고, 무기다. 인간이 휘두르는 대로 휘둘리고 부러뜨리는 대로 부러지고 망가뜨리는 대로 망가지는 것이 용도다, 그저 칼이다. 그렇게 계속 말했어.......칼이니까, 당연히 사람을 베었어야지.
-베는 대로 베이고서도 바로 회복해주니 그 이상가는 인간이 어디 있었겠어? 나같이 인간을 베고 싶어했던 녀석들은 그것을 진짜 좋아했어.
잘도 말하는군. 인간이 아닌 신에게도 감정이 있고 마음이 있을 텐데.
미안하다고 느낀 적이 없느냐고 설교할 거야? 길어질 거면 집어치워. 남에게 듣고 싶지 않으니까.
도다누키 마사쿠니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인수담당자에게 몇 발자국 다가왔다. 인수담당자는 솔직하지 않은 도검이라고 생각했다. 본체를 건네받고 가만히 바라보니 도다누키 마사쿠니는 현현을 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뒤의 처분은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말하겠다면서. 도다누키 마사쿠니의 본체를 허리에 차고 인수담당자는 가볍게 수첩에 기록을 남겼다. 이 혼마루에서 사니와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납득이 간다. 그래서 더욱, 사니와가 여길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을 납득하기 힘들다. 고통스러워서 그 또한 제정신이 아니었을까.
-하치스카를 별채에 두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군데군데 덜 씻어낸 피가 엉겨붙어 있는 금색 갑옷을 입고 있는 하치스카 코테츠가 자신을 딱 봐도 비우호적으로 보고 있었다. 인수담당자를 바라보던 시선이 도다누키 마사쿠니의 본체에 멈춘다. 적대적인 시선은 무엇을 생각하는 것처럼 바뀌더니 한참 뒤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손끝을 따라 시선을 두자 폐가 같은 본채가 시선에 들어온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를 묻자 하치스카 코테츠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기에 우라시마가 있으니, 데려가라. 이제는 지쳤다고 하더군. 바보같이 순한 아이라서, 그것한테까지 신경쓰느라 남들 두배로 지쳤겠지.
우라시마 코테츠는 전 사니와를 해치지 않았단 뜻으로 이해하겠다.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데려가겠어.
이야기라, 이제 와서 인간에게 이야기할 게 있나? 그것을 데려갔다 했으니, 그것에게 들어도 좋을 텐데.
너희의 상처입은 이야기를 묻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야. 때로는 그거 어쩌다가 다쳤느냐고 묻는 말 한마디조차도 상처가 되지.
하치스카는 약간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여기서 나가지 않은 이유라면, 하나밖에 생각하지 못하겠군. 카센 카네사다야.전 사니와가 부임해오기 전 이 혼마루에는 카센 카네사다가 없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그의 초기도의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카센 카네사다가 너희에게 잡혀있던 3년 간은 이해가 가지만. 그것만은 모르겠더군, 그것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아무튼 그것은 카센 카네사다를 찾고도 정부에 아무 보고도 하지 않고 계속 이 혼마루에 남아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변하지 않았지.
그러고 보니, 내가 도착했을 때 그 카센 카네사다는 깨져 있었지 않나.
일찍 왔다면 카네사다의 명검이 부러지는 모습도 볼 수 있었을걸, 그가 부러진 것과 네가 도착한 시간은 아주 조금밖에 차이나지 않으니까.
비웃듯 말하는 하치스카 코테츠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명도로서의 긍지는 땅에 떨어지고, 진품으로서 가져야 할 광채도 없지. 코테츠의 이름을 칭할 자격이 없으니 더 이상 존재할 필요도 없다.
-칼 두자루를 차고 보니 조금 무겁다.
-헤에, 칼 모으는 취미? 두명이나 있네.
우라시마 코테츠를 수습하러 본체로 발을 옮긴 인수담당자의 앞을 조그만 아이가 가로막았다. 인수담당자는 조금 긴장했다. 결계에 특화된 사니와이긴 했지만 그래도 대태도인 호타루마루를 상대로 자신이 잘 막아낼 수 있을지는 조금 불안하다.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할까 하고 망설이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호타루마루는 몇 걸음 다가왔다. 여기 있는 도검들은 누구 하나 피를 묻히지 않은 검이 없었다. 호타루마루는 유독 그게 심한 편이었지만.
사니와, 갔지?
알면서 묻는 건가.
그렇게 두드려도 안 가더니. 내 말은 결국 안 들어줬네.
무슨 말을 했길래?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죽일 거라고 했어. 나, 인간이 싫거든. 그래서 돌아가라고 했어.
-호타루마루가 자신에게까지 적의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기에 적당히 부러진 나무등걸에 앉아서 옆자리를 툭툭 쳐보였다. 호타루마루는 망설임도 없이 옆에 와서 앉았다. 어린 아이의 몸이지만, 여차하면 바로 자신을 벨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으니까 경계심을 보일 필요가 없어서 이렇게나 대담히 행동하는 건가 하고 생각하며 그는 물었다.
전 사니와는 카센 카네사다 때문에 혼마루를 떠나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그거, 우리가 잘못했다는 소리지?
내 입장에선 전 사니와의 편을 들 수밖에
.그래서 베어서는 안됐던 거야? 이유가 있으니까? 우리는, 우리에게는 이유가 없었어?
우리를 괴롭히면 안되는 이유는, 없었던 거야?
아팠는데.
쿠니토시도 아프고, 쿠니유키도 아프고.
-가라고 했는데 안 갔으니까 죽이려고 했는데, 잘 안 죽었어.
......
팔을 잘라도 다시 붙어버리고, 배를 찔러도 아물어버리고, 좋아하는 애들도 많긴 했지만, 나는 귀찮으니까 싫었어. 아...또 안죽었네, 하고 생각했어.
......
사니와도 죽기 싫었던 걸까.
......
그렇게 죽기 싫으면 나가버리면 됐을 텐데, 그렇게 말하니까 쿠니유키가 고개를 저었어.
아카시 쿠니유키가.
응. 우리가 가지고 있던 재액을 뒤집어씌워버린 카센 때문에 나갈 수 없을 거라고.
재앙신이 된 도검을 가지고 현세로 돌아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니와는 그 때문에 카센 카네사다를 구해내고 나서도 돌아오지 못했던 것이었나. 인수담당자는 그제서야 조금 알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온 이야기만큼 무겁고 깊은 한숨이다. 호타루마루에게 언제나처럼 향후의 대처를 이야기하고 의향을 묻는다. 호타루마루는 눈을 감았다. 반딧불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꽤나 긴 하루 일과였다. 대화한 도검의 본체들을 가지고 돌아가던 중 발치에 무엇인가가 치였다. 화려하게 장식된 낯익은 칼집이다. 상부에 따로 보고하지 않는다면 가지고 돌아가서 건네주는 정도는 문제가 안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인수담당자는 칼집을 집어들었다. 혹시 문제가 된다면 병자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서라고 우길 생각이다.
-일기: 보고서를 작성했다. 내일부터는 더 본격적으로 업무에 들어가야겠다. 그러니까 다 잊어버리자. 나는 손을 댈 수 없는 이야기다.
번외: 새해인사
-계절은 마음대로 바꿀수 있으니까 날짜에도 큰 의미는 두지 않았다. 당장 일주일 전에도 크리스마스를 별 생각없이 넘기기도 했고. 애초에 신들이 모여있는 혼마루에서 타 종교의 신이 탄생축일을 기념하는 것도 조금 그렇지 않나.
그러니 오늘도 다른 날과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남사들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일단 하루의 시작은 다른 날과 같았다. 자기들끼리 전날 근시를 정해둔 뒤 그 근시가 아침에 나를 깨우러 오는 것이 아침의 시작이다. 오늘의 근시는 우라시마였다. 우라시마는 생글생글거리며 들어오자마자 환한 얼굴로 말했다.
주인, 새해 복 많이 받아! 헤헤, 나 뭐 줄거 없어?
......응?
새해니까 세뱃돈!
뭐라고 하는 건지 따라가기가 힘들다. 일단 돈을 줘야 하는거 같긴 한데 월급은 다 계좌에 들어있고 쇼핑도 그냥 카드결제 같은 걸로 하니까...돈을 어떻게 줘야 하지. 고민하고 있으니까 우라시마가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내 앞에 마주앉았다.
뭐,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이번엔 주인 차례네. 빨리 인사해야지.
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렇게 말하자 우라시마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자기 몸 여기저기를 뒤적거려서 조그만 주머니를 하나 꺼내 쥐어주었다.
생각해보니까 주인은 아직 100살도 안된 어린애잖아? 세뱃돈은 우리가 줘야지. 주인이 올 한해도 새해 복 많이 받고 올해는 안 아팠으면 좋겠어.
얼떨떨하지만 일단 고맙게 받았다.
-설날이니까 오늘은 출진도 원정도 없는 것으로 정했다고 한다. 사니와인 나한테 한 마디 정도는 물어볼 수도 있지 않냐는 생각도 들지만, 어차피 나한테 물어봤어도 그러라고 말했을 테니 문제없지.
그런데 다 좋은데 남사들이 설날을 이렇게 중요시할 줄 몰랐는데...돈을 좀 찾아올 걸 그랬나. 괜히 눈치가 보여서 남사들을 바라보았지만 평소처럼 자기들끼리 혼마루의 일을 찾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내 방에서 우라시마가 갖다준 설음식을 먹고 있었다. 맛있다.
-오늘은 한 명씩 방문을 오는 날인가 보다. 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신나게 열어젖히고 시시오가 들어오자마자 우라시마랑 똑같은 짓을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시시오는 대놓고 세뱃돈을 달라고 한다는 점이다.
앞에 앉아서 눈을 반짝이는 시시오를 보고 솔직히 돈이 없다고 하자 시시오가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주인은 돈이랑 거리가 멀게 생겼거든!
그, 그냥 현금이 없는거 뿐이잖아.
그게 그거지 뭐.
생각해보니 카드나 예금 등의 개념이 있는 녀석이 이 혼마루 안에 몇 없긴 하다. 그것만으로 내 위상이 이렇게나 추락하다니.
아무튼 고마워, 시시오도 새해 복 많이 받아. 올해는...음, 애들하고 싸우기 없기.
으음, 어려운 주문이네, 그래도 곧 그렇게 될 거 같으니까! 주사부릴까봐 술도 못 마시고, 올해는 꼭 고칠거야! 그러니까 주인도 이제 몸에다가 못된 짓좀 그만하고!
요즘은 별로 안해...
-신년이니 참배 정도는 하셔도 좋지 않으십니까?
그러고 보면 혼마루 저쪽에 조그만 신사가 있긴 하지만 신검이라고 불리는 남사들이 혼마루에 없으니 딱히 관리를 할 수가 없다. 그냥 청소나 해주는 정도다. 그리고 나는 그 근처에는 가지도 않는다.
안 좋은 기억이 있으니까 신사에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자 하세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실 거라고 생각해서. 한번 오미쿠지 정도는 만들어 와 봤습니다만.
그걸 어떻게 만들어왔어?
당연히 제대로 만들지는 못하니 가볍게 기분이나 내시라고.
그냥 종이쪽지를 여러개 접어서는 작은 상자 안에 넣어온 것 뿐이었지만 그 배려가 고맙다. 상자 안에 손을 넣어 쪽지를 한개 집어 펴보니 대길이라고 쓰여 있었다.
하세베.
왜 그러십니까?
상자 안에, 흉도 있어?
......
눈을 돌리며 딴청을 피우는 걸 보니 분명 대길밖에 없을 것이다.
-처음엔 흉도 만들어 봤습니다만...
음, 그런데?
모노요시 사다무네가 가져갔습니다. 주인님의 운세에는 필요없다고 하더군요.
뭔가 찡해진다. 얘네 정말 왜 이러지. 나중에 모노요시를 찾으면 꼭 고맙다고 말해줘야겠다.
-우리 주인, 새해 복 많이 받고 올 한해는 건강해야지!
그래그래, 고토도 새해 복 많이 받고.
헤헤. 그래서 준비해왔어, 방금 마에다랑 히라노한테도 주고 오는 길이야.
고토가 하얀 봉투를 하나 내민다. 역시 겉모습은 나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단도한테 세뱃돈을 받아도 뭔가 면목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걸 아는지 고토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 뭐하면 그걸 마에다하고 히라노한테 줘도 괜찮아! 주군하고는 아직 어색하지만 그래도 새해 인사 정도는 드려도 될지 자기들끼리 고민하고 있는거 같으니까.
너, 정말 좋은 형이구나...
그치? 키만 조금 더 크면 더 바랄 게 없는데 말야.
-고토한테 들었는데 말야, 인사해도 괜찮아. 당연한 거잖아.
그렇습니까?
하지만 저희는...
한 식구지.
아...
그거 말고 다른 표현을 잘 모르겠네,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말이어도 괜찮지만, 인사를 머뭇거릴 만큼 먼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렇군요.
마에다가 머뭇거리는 것을 다독이며 히라노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주군. 신년인사를 하시는 길이라면 동행할까요?
음...부탁하고 싶지만, 마에다가.
......죄송합니다.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신년 인사를.
마에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거기까지는 거부하지 않는 사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더 친해지려면 노력해야겠지.
-계절을 바꾸는 게 어떤가.
겨울은 겨울이잖아.
그런건 신경쓰지 않는 주의 아니었나, 그리고 계절을 바꾸지 않을 거라면 옷을 더 두텁게 입어.
하하, 고마워. 그보다 너부터 그 소매 좀 그만 걷고 다니지 그래, 보는 내가 다 춥단 말야.
내 마음일 텐데, 그런 건.
그것도 그러네. 아차, 새해 복 많이 받아.
음.
나같은 사니와도 주인이라고 생각해줘서 고마워.
새해인사 뒤에 그런 입맛쓴 말을 붙이지 마라.
그런가...
딱히 설날이라고 어울려줄 생각은 없지만, 혹시라도 필요하면 불러라.
응, 고마워.
-우라시마에게 세뱃돈을 받았다며? 그렇다면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
그렇게 되나? 아무튼 하치스카도 새해 복 많이 받아.
하하, 그래. 이제는 나름 인사도 할 수 있게 됐네.
그건 너를 처음 데려왔을 때부터 그랬잖아.
아니지, 그 때는 더 불안하고 영 보기 힘들었거든. 그땐 나는 나대로 다른 데 신경을 쓰느라 네가 그렇다는 걸 몰랐지만.
......가, 갑자기 이런 날에 그렇게 진지하게 분위기 잡지 말란 말야. 어색해.
그렇다면 그만두지. 그리고 이거.
너무 두터운데요, 진품 코테츠님.
격식이란 건 중요하거든. 필요없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도 중요한 거니까. 너도 조금 더 드러낼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하하하하, 설날이라는 것은 좋구나. 먹을 것이 많아.
볼 때마다 신기하네, 살도 안찌고. 그렇게나 먹는데.
칼이 아니더냐, 칼이 살쪄도 이상한 일이지. 잠시 옆에 앉아보겠느냐?
응? 여기 앉으면 되나. 어, 이건 왜 주는 거야?
세뱃돈을 줘야겠지만 이걸로 대신해도 괜찮겠느냐.
응? 그런건 상관없어. 나도 과자 좋아하니까. 고마워.
하하하. 다행인지고. 올해는 아프지도, 다치지도 말거라.
음...노력할게. 미카즈키도 새해 복 많이 받고.
그럼그럼, 그래야겠지. 나는 주인이 챙겨주는 것이 좋으니 주인과 백년해로하고 싶구나.
......
주인을 챙겨주는 것도 좋단다.
-오미쿠지 고마워.
아니에요! 주인님께는 언제나 행운이 가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대길만 가득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 했는데.
앗, 그럼 제가 잘못 생각한 건가요? 죄송해요...
으아아, 아, 아니야. 풀죽지 마. 덕분에 올 한해는 좋은 일만 가득할 거 같으니까.
진짜지요...?
그럼그럼. 그러니까 모노요시도 새해 복 많이 받아.
에헷, 감사합니다!
굳이 오미쿠지가 아니더라도, 모노요시가 있으면 분명 행운이 가득할 테니까.
진심이었다. 굳이 다들 노력해서 모노요시를 데려다준 의미를 알고 있다. 그러니까 분명 모노요시는 행운의 상징이고, 같이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
-신년 선물이야.
으음, 주인이 가진 나에 대한 이미지가 일단 술이라는 건 알 것 같군. 부정하진 못하겠지만.
주면 받을 거잖아.
그건 그렇지. 한 잔 하겠는가?
음...오늘은 마셔도 괜찮아.
초하루니까. 아무튼 주인이 대작해준다면 기쁜 일이지. 받아.
많이는 못 마시는데.
그건 알고 있어, 술을 못 마시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권하는 건 주도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
첫 잔에 주인의 무병장수를 기원해 볼까.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응, 니혼고도.
주인의 상처에 이 첫 잔이 소독이 되면 좋겠군.
-주인! 신년이니까 잔치하자!
축제가 아니라?
신년에도 축제해도 되는 거면 축제도 좋지!
이제 완전히 밝아졌네, 보기 좋아.
헤헤, 여기에선 그렇게까지 무서워할 거 없으니까.
그렇다고 말해주면 나도 좋지. 자, 새해 복 많이 받아.
우와, 이런건 내가 주인한테 줘도 되는건데! 정말 받아도 돼?
그럼. 뭐, 내가 더 어리지만은...괜찮지?
음...그렇게 말하니까 역시 주인한테 뭔가 줘야 할 거 같고...자, 이거!
내가 준 거잖아.
응, 그러니까 내 돈이고 내 돈으로 주인한테 세뱃돈을 주는 거지, 새해 복 많이 받아야 돼!
뭔가 이상하지만 받아야겠지, 고마워.
응, 그리고 주인, 저번에 한 말 취소야. 살아있으면 좋은 게 많아!
-하루종일 어딜 그렇게 돌아다녔어! 찾아다녔잖아!
아니, 그게...미안.
나한테 제일 먼저 와서 새해인사도 안해주고. 이제 다른 애들이 더 귀엽다 이거지?
그거 아니라니까, 미안해. 카슈한테 먼저 갔어야 됐는데.
흥.
나도 실망이구나, 요 녀석아. 어찌 그렇게 다른 녀석들만 먼저 찾아다니느냐.
엑, 왜 츠루마루 씨까지 온 거야. 둘만의 시간을 주면 안돼?
내가 그렇게 놔둘 거 같으냐,
오늘은 기본적으로 맨투맨으로 모두를 대하기로 했는데...둘다 뭐하는 거야. 우선 싸우지 말고. 새해잖아.
치, 주인이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
그래그래, 사이좋게 지내자꾸나, 신선조의 꼬마야.
진짜 둘 다...일단은 설날이잖아. 둘 다 새해 복 많이 받고, 올 한해도 잘 부탁해.
둘 다 어떤 의미로든 나에게는 처음이다. 죽으려던 내가 처음 만나서 처음 치료했던 검, 내가 처음으로 선택해서 함께 한 검. 둘 다 정말로 소중하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슈와 츠루마루는 웃었다.
주인도 새해 복 많이 받아! 주인, 요즘 많이 좋아졌으니까 앞으로는 더 나아질 거야.
그래그래, 네가 얌전히 있는 만큼 나도 이렇게나 멀쩡해지지 않았느냐. 이제는 흉터도 많이 없어졌단다.
아니, 굳이 손목을 보여줄 필요는 없으니까...그리고 나도, 어떻게든 이겨내고 싶으니까.
그렇겠지, 그러면 함께해주마.
나도나도! 주인이 준 것만큼 꼭 돌려줄께!
-너무 큰 것을 새해 첫 날부터 많이 받아온것 같다. 누운지 한시간이 넘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는게, 왠지 기뻐서 두근거려서 그런거 같다.
올해는 조금이라도 더 저들의 주인으로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역시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새해 첫 날에 추억에 발목을 붙잡혀서는 안 되는데도.
오늘 하루만 그리워하기로 하자.
번외: 만우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