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시시오의 시점
-주인은 참 편하게도 산다. 물론 그걸 마냥 편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도검들은 여기에 없다. 나도, 다른 남사들도. 아무튼 부러지거나 차라리 그러는게 나았을 이전 주인들의 횡포를 다들 겪어왔다 보니 지금의 생활에 불만을 가진 도검은 아무도 없다. 그러면서 조금씩 나아진다. 우라시마는 아직 주인처럼 편식이 심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용궁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할아버지는...글쎄, 그거 문제일까? 우라시마도 말한 거지만, 할아버지 옆에 있으면 모기에 안 물려 좋은데. 본인은 개미 한마리도 죽이고 싶지 않은가 보다. 근데 그건 그것대로 문제 아닌가, 도검남사인데. 모르겠다. 이런건 주인이 해야 되는 고민이다.
-사실 주인은 좋은 사니와라고 하기는 조금 그렇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근데 그런데도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뭔지는 알고 있는 인간이라서 나는 용서했다. 사실 속은 기분도 든다. 남을 정화하면서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보여주는건 반칙이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너는 현현이나 해서 평범하게 잘 지내라 이거잖아! 자기가 무슨 동물원 사료처럼 쓰인 과거를 보여주면서 그래도 나는 너라면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웃음) 이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암튼 효과는...대단하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때리거나 벨 수 있냐고.
-주인이 옆에 있던 나를 돌아보더니 음, 나 이정도면 정말 멋있게 과거의 늪에서 벗어나고 있는거 같아. 라고 말했다. 정강이를 걷어차줬다. 과거의 늪에서 잘도 빠져나오셔서 잠자기 싫다고 11일이나 밤을 새며 할아버지를 정화했구나 하고 비아냥거려주자 내가 변했다고 슬픈 척이다. 보호해줄 생각은 들게 하던가, 쥐어박고 싶게 하던가 둘 중에 하나만 좀 했으면.
-전골파티 땐 깜짝 놀랐다. 그러고 한나절은 고기 생각도 안났었다. 묵은 상처가 대체 왜 터지는 건데...암튼 아파보이니 눕혔다. 주인이 쉬는동안 모두가 주인의 뒷담과 주인에 대한 의논을 했다. 그게 막 엉뚱한 쪽으로 대화가 튀더니 정신차렸을 땐 각자 하나씩 주인에게 바라는 것을 쓰고 있었다. 나중에 사니와 규칙리스트 같은 걸로 남긴다던가. 내 차례에 돌아온 종이를 읽어봤다.
나만 귀여워해줄것!
그대로 있어도 충분히 놀라우니까 제발 그대로 좀 있었으면
혼자 죽어도 상관없는건 나뿐이다, 너는 아니야.
주인을 보살피고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한숨이 나왔다. 뭔데 이게...하고 투덜거리며 다음순서에게 보여주자 탄식이 터져나왔다. 초기멤버들이 이상한 놈들밖에 없는거야 알긴 아는데 목적을 기억못하는 바보이기까지. 주인이 하지 않았으면, 해줬으면 하는 일을 쓰라니까.
-암튼 각자 겨우 리스트를 만들어 건넸다. 주인은 불만투성이인 얼굴로 너희들이 나한테 하면 안되는 일 리스트부터 만들어야 될거 아냐! 라고 항변했지만 우리는 그런게 없다, 존재할 수가 없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참견도 하지 말라니 진짜 건방지고 못된 데다가 멍청한 인간이다, 우리 주인은. 다음날 주인도 리스트를 뽑아와 건넸지만 우리가 지킬수 없는 규칙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더 바보라서 옆에서 잘 지켜야겠다.
(14)
새로 데려온 단도는 웃지 않는다. 말도 하지 않고, 무슨 말을 해도 대답도 하지 않는다. 원래라면 시끄러울 정도로 잘 웃고 잘 떠드는 성격일 텐데. 괜시리 저렇게 우울한 모습을 보면 나는 나대로 내 배를 가르고 폭죽을 쑤셔넣던 다른 혼마루의 저 아이가 생각나곤 한다. 아이러니하게 더 큰 일을 당할 뻔했던 나를 구해줬던 건 호타루마루였다. 뭐, 나를 위해서는 아니고 그냥 살 타는 냄새가 싫다며 아예 타는 부분을 날려줬을 뿐이지만...뭐, 그정도의 일이 한두번도 아니었고, 별 상관없지. 지금은 나는 됐고 저 애부터 어떻게 해주고 싶다. 산 채로 살육축제(무슨 축제인지 따로 기재돼 있던 주석은 일부러 무시했다)날 큰 모닥불에 던져져 타올랐다는데 아니 왜 불 트라우마가 없는 애한테도 그런걸 심어주고 난리인지. 덕분에 전문가도 아닌 나에게 언제나 고뇌거리가 밀려온다. 웃게 해주고 싶긴 한데.
"가만 보면 주인에게는 피학성향이 있는게 아닌가 싶어.""그런게 있을 리가 없잖아, 지금도 초기도 님의 막말에 마음이 부러져버릴 거 같은데."
카슈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러운 손길로 먹고 있던 과자를 뺏아 한쪽으로 치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음이 아프다.
"꼭 보면 어디서 주인 같은 애들만 데려오더라."
"네네, 그게 제 일이라서요. 나같은 도검 1호님. 요즘은 나 없이도 잠은 좀 잘 주무세요? 우쮸쮸쮸,"
"장난치지 좀 말고! 아무튼, 아이젠 쿠니토시에게 불 공포증이 있단거 자체는 우리가 평소에 불을 잘 안쓰니까 문제가 아닌데, 그게 주인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 아니야?"
"그거야 뭐...새삼스럽게 뭘 그런걸 이야기해. 여기 있는 애들 다 그렇다니까."
내가 당한 일과 너희가 당한 일은 언제나 비슷하다. 거울을 비춰보는 거 같아서 나는 언제나 마주본 거울 위로 일부러 입김을 불어 흐리게 하는 것처럼 매일을 보내고 있다.
"나도?"
"뭐야, 우리 사이에 다 이야기 끝난걸 새삼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이딴 걸로 얼버무리지 말란 것처럼 손을 쳐냈지만 조금 있다가 스스로 다시 내 손을 잡아 자기 머리위에 올리는 카슈였다. 카슈의 솔직한 점이 좋다.
카슈는 그렇지 않은가보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튼 친하게 지낼 거면 다같이 그렇게 해. 혼자 그러지 말고. 그리고 누구랑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근시 대동! 그게 꼭 나여야 한다고는 이야기 하지 않을 테니까."
"아직 아이젠에게 아무것도 못했으니까 벌써 그렇게 잔소리 하지 않아도..."
"제대로 대답해야지. 규칙규칙."
"에...혼마루의 사니와 된 자로서 도검과 언제나 의사소통은 진지하고 진실되게...?"
"아이고 잘했어요 우리 사니와님~"
역으로 쓰다듬받는 기분도 묘하긴 묘하다.
-아예 마음을 닫은 건지, 아이젠 쿠니토시는 내가 무엇을 해도 반응하지 않았다. 싫다고 발버둥치거나 무서워하거나 하는 거랑 무반응 중에 무엇이 더 상처가 되는지 이번 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냥 움직일 수 있는 인형을 앞에 두고 그 인형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평범한 아이젠 쿠니토시를 본 적이 없지만, 아무튼 이런 느낌은 이상하다. 심지어 내가 알고 있는 아이젠 쿠니토시도 적어도 나를 괴롭힐 때는 밝고 쾌활한 느낌이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무엇을 해도 무반응이었기에 돌봐주는게 힘들지 않았다는 것 정도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건 실례일까. 간만에 누군가의 옷을 갈아입히거나 밥을 떠먹여주게 되어 묘한 기분이었다.
-밤중에 한번은 깨워서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옷을 갈아입힌뒤 여전히 무표정이지만 불안한 기색이 엿보이는 것도 같은 아이젠을 달래선 같이 잤다. 어차피 간만에 이불 빨래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으니까. 그나저나, 이렇게 보니까 정말로 어린애같다. 조금씩 정신이 회복될 때까지는 아이라고 생각하고 돌봐야겠다.
-의외로 내가 할 일은 금방 또 거의 없어졌다. 미카즈키가 아이젠에게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기 옆에 앉혀놓고는 간식을 나눠주거나, 같이 손잡고 혼마루 정원을 한바퀴 빙 돌면서 산책을 하기도 하는게 어린아이를 본게 처음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우라시마나 카슈 정도면 어린이 라인에 넣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 혼마루에는 단도가 없었던 터라 외모까지 완전히 어린아이같은 도검남사는 이번에 온 아이젠이 유일하다. 미카즈키도 아직 누가 돌봐줘야 할 상황인데도. 괜히 보고 있으면 복잡한 기분이 들어서 간식을 가져다 미카즈키와 아이젠에게 나눠주었다.
-'그런데 왜 하필 아이젠 쿠니토시에요? 단도라면 구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정부에서도 그냥 갖다놓았지 여차하면 그냥 도해하는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래서 데려온 거야.'
'하긴. 원래 성격 그렇게 이상했죠. 괜히 힘들고 별 도움도 안되는것만 열심히 하고.'
담당자의 말을 들으면서 그러니까 지금 사니와같은 짓이나 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해주고 싶어졌다. 하지만 구하기 어렵지도 않고, 특출나지도 않지만 없는 것보다 나아 쓰는 거라면 우리 혼마루에 있는 다른 무엇인가와 많이 닮은거 같지 않은가. 영력이 특출나지도 않고 인물이 잘난 것도 아니지만 사니와 일은 할 수 있는 누군가랑. 괜히 마음이 무겁다.
-호타루마루를 데려올 수는 없지만 반딧불이라도 보여주면 어떨까 싶어서 밤의 혼마루에 반딧불을 풀어놓았다. 어두운 밤의 정원을 녹색 빛이 장난처럼 비춘다. 툇마루에 앉아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아이젠에게 겉옷을 덮어주었다.
-미카즈키에 이어 시시오가 아이젠에게 관심을 주기 시작했다. 자기에게 먼저 다가오지 않고, 자길 때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확인한 모양이었다. 아이젠에게 모피를 가지고 놀아도 좋다고 내미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말 소중히 여기는 물건이었을 텐데. 아이젠은 가만히 누에의 모피를 꼭 덮고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다른 도검들은 확실히 내가 새로 데려오는 도검들에게 관심도 많고, 기본적으로는 호감을 가지고 대하는 것 같다. 나로서는 정말 고마운 일이다.
-그걸 이제 알았느냐, 바보같은 녀석아.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이 바보니까 이제부터 바카마루 쿠니나가라고 불러도 괜찮아?
그러는 너야말로 그 쓸데없이 화려한 사니와명은 걷어치우고 제대로 바보라고 불리는게 나을지도.
그렇게 말하더니 하얀 학이 웃는다.
다들 네가 우리같은 녀석들만 모아다가 어떻게든 쓸만한 것으로 돌리려고 하는건 알고 있고, 우리는 주인에게 도움이 되고 싶을 뿐이니까.
도움이라.
그래, 네가 매번 기억에 지고 무서움에 지지 않게 말이지.
-꿈을 꿨다. 전 혼마루의 꿈이다. 사는 자들을 닮아 칼같이 부는 바람이 살을 에이고 조그만 우박이 떨어져내리는 혼마루에는 이전에도 꿨던 꿈이 이어져 있었다. 붉게 얼룩진 눈밭 한가운데 일직선으로 이어진 봄색 발자국을 또다시 따라간다. 여전히 모란꽃이 한가득 핀 나무가 반긴다. 나무 밑에 기대어 앉자 춥지 않았다. 올려다본 끝없이 흐린 하늘 너머로는 가느다랗게 달빛이 보일듯 말듯 하지만 구름이 겹겹이 끼어 아직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문득 내려다본 발치에는 하늘나리 꽃이 한 송이, 피안화가 한 송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따뜻한 향기에 눈을 떴다. 아직도 한참 어두운, 따스한 밤이었다.
-꿈은 기억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있을 때부터 최근까지 나는 언제나 다치고 베이고 잘리고 찢어지는 꿈만을 꿨기 때문이다. 그 꿈이 봄색으로 덧칠되는 것은, 나의 현재가, 지금 보내는 시간이 봄색으로 덧칠되어가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꿈 속에서 전 혼마루를 완전히 봄색으로 칠하는 날이 온다면 나는 그 때 여기 있는 남사들에게 만나고 싶어하는 모두를 데려다줄 수 있을 것이다. 아이젠 쿠니토시에게 호타루마루를 만나게 해주고, 오오쿠리카라와 츠루마루 쿠니나가에게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를 만나게 해줄 수 있겠지.슬퍼서 우는 건 아니다. 내게도 그 모든 것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질 날이 올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아마 한 송이의 꽃은 꽃말 때문에, 다른 한 송이의 꽃은 그 이미지 때문에 거기 있었을 것이다. 꽃말은 몰라서 찾아보았지만. 왜 그 두 꽃이 피었는지 알거 같았다.
-오늘의 근시는 하치스카였다. 표정이 밝아 보인다며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그런 말을 들은 건 이 혼마루에 오고 나서 처음이다. 조금 기뻤다. 하치스카랑 같이 오늘의 일정을 의논하여 출진과 원정을 보냈다. 다시 조용해졌다. 여전히 무표정하게 무릎을 감싸안고 있는 아이젠을 달래 세수를 시키고 밥을 먹였다. 전처럼 싫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어린이용 그림책 같은 거라도 좀 주문해서 보여주는게 정서안정에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물품 주문을 위해 인터넷을 하고 있자니 하치스카가 지나가듯 가볍게 정서 안정에 좋은 책이라면 주인을 위해서도 한권 정도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농을 걸어왔다. 이녀석이 정말.
-원정은 대성공이다. 카슈랑 우라시마가 도움패를 주워왔길래 오늘 간식으로 준비해둔 과자를 하나씩 더 주었다. 출진에서 돌아온 남사들한테도 부상이 없었으니까 잘한 거라고 과자를 하나씩 더 주었다. 그러고 나니 정작 내가 먹을 건 없길래 내색하지 않고 방으로 돌아가려던 차에 츠루마루에게 붙잡혀서 과자를 나눠받았다. 이번주의 업무 할당량은 끝나서 더 출진할 필요는 없어서 남사들이랑 같이 밭에 가서 감자를 캤다. 내일은 통감자 구이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자기 전에 아이젠이랑 시시오가 손을 잡고 방으로 찾아왔다. 같이 자자고 했기에 남는 이불을 가져다가 깔고 아이젠을 가운데 눕혀 나란히 잤다. 내천자를 그리며 자는게 꼭 가족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45분만에 잠들었다. 눈을 감고 찾아오는 무서움도, 금방이라도 결계를 쳐 막아내고 싶은 불안감도 천천히 희석되고 풀어져가는 모양이었다.내가 당신들을 구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나를 구해주는 것이다. 언제나 알고 있던 사실을 약간 더 따뜻하게 확인한다.
-며칠째 평온한 나날이 지나갔다. 출진횟수는 언제나 정해진 최소한으로 유지하고 있기에 할당횟수를 마친 주에는 남사들이 원하지 않는 한 출진을 보내지 않는다. 그 동안은 이불을 빨고 대청소를 하고, 상점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기도 한다. 그 며칠이 끝나갈 때쯤 아이젠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때 타버렸어야 했는데.'
그 말에 깊게 공감했다. 아이젠이 그랬어야 한다고 공감한게 아니라, 나도 스스로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어디선가에서 죽었어야 했다.
'나도. 카센이 죽었을 때 죽었어야 한다고 생각해.'
'......지금도? 당신은, 행복하게 살고 있잖아. 매일이 축제인 것처럼.'
행복해 보이는구나, 하고 안도했다. 입밖으로 꺼내 말하지는 않았다. 행복해도 괜찮을까. 나는 카센이 없는 여기에 있어도 괜찮을까.
'소중한 사람이 없는 세상은, 가끔 흑백으로 보여. 자기 피라도 흩뿌려 빨간색으로 보이는지 확인하고 싶을 정도로.'
'당신도 그렇구나.'
'너도 그랬구나.'
더 이상 해줄 말은 없었다. 아이젠도 약속처럼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 뒤로 아이젠은 여전히 말이 없고 웃지 않지만, 그 전의 불안정함은 많이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수리실은 출진에서 부상입은 남사를 치료하기보다는 엉뚱한 일에 더 많이 쓰인다. 오늘은 밤나무에서 떨어진 오오쿠리카라를 수리실에 밀어넣었다. 밤이 먹고 싶었다면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혼마루에 오븐을 들여놓기로 했다. 어차피 홈베이킹 수준이지만 간단한 간식 정도는 만들 수 있다. 큰 오븐을 사는게 한번에 여러명 분의 간식을 만들기 좋을 테지만, 나는 등을 떠밀리는 것이 두렵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데도 웃음소리와 오븐이 닫히는 소리는 여전히 기억에 선명하다.어떻게든 살아있기는 하지만, 아마 오래 구워지면 죽기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신체의 비밀을 그때 조금 알았다.
-쿠키는 돌덩이처럼 못생겼지만, 그럭저럭 맛은 있었다. 남사들이 치유력 말고는 장점이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다며 놀라워했다. 혼마루 내 기강이 이렇게나 심각하다.다 먹고 나서 쿠키틀을 새로 여러개 주문했다. 괜히 뭐든 돕고 싶어하던 남사들을 위해서였다. 다음날 쿠키를 구울 때 기웃거리던 남사들을 불러 반죽에 쿠키틀을 찍게 했다. 카슈가 매니큐어를 바른 손 모양 쿠키를 만들겠다고 야심차게 반죽에 데코를 했지만, 다 구워진 비쥬얼이 퉁퉁 부은 잘린 손목 같았기에 사진을 찍어 보존했다. 앞으로 놀려먹을 때 써야지.
-"현세엔 안 나와보네요?"
"아는 사람이 없어."
"왜 없어요, 나도 있고, 담당부서 사람들도 있고."
"너는 차라리 몰랐으면 싶고, 일적으로 만나는 사람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아."
"그런가요, 시설 사람들이나 대학 동기들 정도는 만나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 잊어버렸어. 이름도. 얼굴도."
여기밖에 없다.
-가끔씩 정말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고비에 몰렸을 때 기억이 사라질 때가 있었다. 당연히 그때는 모른다. 고통에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벌레처럼 꿈틀거리다가 천천히 나아가고, 다 나은 뒤에도 필요하지 않은 기억이기에 떠올리지 않고 있다가 그것을 떠올려야 할 때가 오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자주 웃던 친구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고, 좋아했던 여자아이가 떠오르지 않고, 보고 싶어서 꼭 품고 있던 친부모의 사진이 어떻게 됐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실제로 내 이야기는 아니라 예를 든 것이다. 정말로 잊어버렸다면 무엇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무엇을 떠올리지 못하는지도 말할 수 없다.그래서 사니와가 되기 전의 기억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전 혼마루의 일도 어떤 것은 플래시백될 때까지 아예 기억나지 않곤 하니 그것만은 다행스럽다.
-다만 도검들이 주인은 현세에서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봤을 때 대답을 해주지 못하는 것이 약간 미안하다.
-정기 출장일엔 어김없이 현세에 나가야 한다. 이번에는 이틀 정도 자리를 비우게 된다. 다른 도검들에게 아이젠을 부탁한 뒤 오오쿠리카라를 데리고 나갔다. 오오쿠리카라는 매우 양호한 상태이며 다른 혼마루의 학대를 받지 않은 평범한 다른 오오쿠리카라들과도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오오쿠리카라는 약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내 몸상태나 영력상태도 평소와 차이가 없다. 이번에도 다른 때보다 조금 기분이 좋아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정신상태도 약간 호전된 것 같다고 했다.검진을 받고 나서는 혼마루의 상태나 운영에 대한 질답을 했다. 도검의 수를 늘리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효율적인 운영이 가능할 거라는 충고를 들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적극적으로 도검의 수를 늘릴 생각은 없다.
-자유시간에 외출이 허가되었기에 오오쿠리카라에게 사복을 입히고 같이 밖으로 나갔다. 별로 할 일은 없고 그냥 필요한 물건 중 몇 개를 직접 보고 고르고 싶어서였다. 물건을 사는 동안 오오쿠리카라는 말없이 바구니를 들어주었다. 내가 한번 바구니를 떨어뜨렸기 때문이었다. 말은 오가지 않았다. 쇼핑이 끝나고 카페에서 음료를 사서 나왔다. 오오쿠리카라는 음료 위에 올라간 휘핑크림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주인이 가고 싶은 곳은 달리 없느냐고 묻기에 고개를 저었다. 기억나는 특별한 장소도, 특별히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다고 말했다. 오오쿠리카라는 무리짓고 싶은 생각도, 어울리고 싶은 생각도 없으나 그런 자신이라도 특별히 여기는 곳도, 특별히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몇백년을 살고 그 대부분이 의미없는 시간이었던 자신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다. 주인은 인간인데도 자신이 유래한 곳에 특별한 아무것도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알고 있는데. 오오쿠리카라가 약간 어색하게 느껴졌다. 나를 위한 말인 건 알지만.
-부탁받은 도검은 잔뜩 금가고 칼집도 더러워진 단도 두 자루였다. 잘 챙겨둔 뒤 담당자에게 작은 부탁을 했다. 그런건 제 업무가 아닌데요, 라고 밉살스럽게 대답하면서도 그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코우쨩의 사적인 일 같은거, 알아두면 그거 때문에 더 재밌어질 일이 많을거 같은데요. 라고 웃으면서. 정말 미운 놈이다.
-가지고 돌아가기 편하라고 두자루 다 단도를 고른 모양이었다. 아는 도검들끼리 같이 보내는 건 나쁜 일은 아니다.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도검들이라면 지금처럼 묶어서 한 세트로 다루는 것도 편한 일이고. 하지만 히라노 토시로가 전임의 사무도구와 문구용품을 가지고 내 몸 위에 창의성을 열심히 시험했던 것은 혼마루 보고일지에 안 썼었던가. 아니면 일부러 이러는 건가.서류를 읽어보았다. 마에다와 히라노는 쌍둥이같은 두 도검이라서, 두 도검의 전 혼마루의 사니와는 조금 특별한 쌍둥이같은 일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도중 실패로 그냥 각각 한 팔을 잘라낸 채 방치되었다고 한다.
-돌아오자마자 두 도검을 현현시켜 수리실로 밀어넣고 나는 수리가 끝날 때까지 방에 있었다. 커터날을 단 컴퍼스, 대형 스테이플러, 순간 접착제, 조각칼, 송곳, 압정. 여러가지 도구를 떠올리면서.전 혼마루의 기억 중 아와타구치의 별채에 잡혀있을 때가 떠올랐다. 등 위에 잔뜩, 잔뜩 메모지가 압정으로 고정된 채로 벽에 박혀서, 잘못된 방향으로 꺾인 발끝에는 호랑이가 두어마리 매달려 장난치듯 조금씩 살점을 까끌한 혀로 핥아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었다.
-두 도검의 방을 안내해주고 잘 돌봐주라고 도검들에게 부탁했다. 나는 조금만 더 쉬고 싶다.
-.......
-그렇게 심하게 찔린 것도 아닌데 너무 아프다. 이 혼마루에 와서 자해 말곤 칼침을 맞을 일이 없어서 내성이 없어진걸까. 사실 화가 나지 않느냐면 거짓말이다. 왜 또, 왜 여기서까지 나는, 왜, 아프고 고통스러워야 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했지만 본체를 두손으로 꼭 쥔채, 날에서 뚝뚝 떨어지고 흘러내리는 피로 손을 물들인 채로 눈의 초점도 제대로 맞지 않는 얼굴을 내게 향하고 있는, 떨고 있는 마에다를 보면서까지 화를 낼 수는 없었다. 현현을 되돌려 쉬게 한 뒤 하세베에게 부축되어 가는 내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픔은 분노와 원한을 낳는다. 누구라도 그렇게나 고통스러웠다면, 한번쯤은 부조리한 분노를 품을 수도 있다. 그게 그들에게 두번이, 세번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마에다와 히라노를 데려온 것이다.
-부조리하게 누구를 미워한 적이 내게도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딱히 이제 미워할 일도 원망할 일도 없다고 대답하겠다. 정정하자면,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었을 땐 그 누군가를 해칠 방도가 없었다. 그 혼마루에선 나를 지킬 힘조차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그게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나를 아프게 한 다른 남사를 해쳤다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무엇이 되어 있었겠지. 하지만 그게 나으려나. 그랬다면 카센은 죽지 않았으려나.
-멀쩡히 나았기에 밖으로 나갔다가 또다시 남사들에게 붙잡혔다. 괜찮다고 배를 까보인뒤 흉터 하나 없는 자리를 손으로 팡팡 쳐 보이고서야 겨우 놓여났다. 그와중에 숨이 멎을 뻔했다면서 그러지좀 말라고 꼬집어대는 카슈가 있었다.한쪽에 약간 떨어져 바라보는 히라노가 있길래 부르자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원래 몸이 튼튼하고 상처가 잘 아무는 몸이라 괜찮다고 안심시키기 위한 말을 꺼냈다. 마에다의 안위를 궁금해하는 히라노를 데리고 마에다를 둔 방에 와서 남은 재액을 처리하고 진정될때까지는 잠시 이 모습으로 둘 생각이라고 말해준뒤 생각해보니 미안해져서 사과했다. 히라노는 고개를 젓고, 형제의 불충을 대신 사과드린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
-새 식구가 들어온 기념으로 가볍게 파티를 했다. 히라노는 시종일관 얼떨떨해하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 케이크가 맛있었는지 잘라준 한조각을 남김없이 먹어주었다. 다행이다. 옆에서 나는 닭죽을 먹었다. 세상은 가끔 불공평하다. 나도 케이크.
-오늘의 근시는 카슈였다. 다들 출진나간 뒤 아이젠과 히라노도 데리고 밭에 같이 잡초를 뽑으러 갔다. 밭일도 제법 잘하잖아, 우리 주인. 그렇게 말하면서 카슈가 웃었다. 칭찬을 받는 건 오랫만이다. 일은 금방 끝나서 출진 전에 하세베가 싸준 도시락을 다같이 먹었다. 방울토마토가 가득 열려있어서 빨갛게 된 것만 골라 따왔다. 샐러드에 넣어야겠다.
-현세에서 연락이 왔다. 담당자는 전에 부탁한 것에 대해 말해주었다. 친부모로 추정되는 사람을 찾았지만, 이미 사망신고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예상은 했지만 현세와의 연결고리는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바깥으로 나가면 여전히 혼자. 뭔가 오오쿠리카라의 입버릇 같은 삶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그가 아니니까 혼자 살아간다는 생각만 해도 우울해진다.결국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겠지.
-우울한 티를 너무 냈는지 츠루마루가 신경을 써주었다. 물론 놀라움을 추구하는 츠루마루니까 신경을 써주는 게 오히려 심장에 나쁘다. 뭘로 복수해야 저 여유로운 도검이 놀라 자빠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다시 사니와의 업무로 돌아갔다. 제법 많이 깨져서 줄어든 도장을 다시 만들어서 나누어주고 도검들의 연도를 확인해서 적절할 거 같은 출진지를 정해둔다. 내번담당을 정하고 자원을 세어 기록했다. 검을 단도하지 않으니 남는 자원은 제법 많은 편이다. 누군가가 다쳐 돌아오더라도 꽤 여유롭지만, 다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자원을 세어 기록한 장부를 보고 히라노가 틀린 부분을 고쳐주었다. 아니...실수 정도야 누구나 할 수 있는 거고. 하지만 히라노는 이런 일에 능한가 보다. 덕분에 그동안 정리하지 못했던 일을 꽤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앞으로 서류관련 일을 도와주기로 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히라노와 머리를 맞대고 자원의 입수량과 지출을 계산하는 건 나쁘지 않았다.
-마에다의 상태는 아직 불안정했다. 하세베의 말로는 히라노보다는 안정된 거 같았다고 했는데. 차분히 대화를 나누어보았지만 여전히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본체를 모셔둔 방에도 느리게 옅은 재액이 끼고 있기에 주기적으로 정화해가며 대화중이다.
-히라노는 아직 내게 서먹서먹하다. 그래서 일부러 서류정리를 돕게 했다. 일이라는 칸막이를 사이에 두면, 조금 대화하기 편해진다. 마에다를 다시 현현시키면 조금 나아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