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즈키의 방을 준비해줬다. 뭔가 필요한 것은 없냐고 묻자 갑자기 미카즈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미카즈키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며 내가 정말 여기에 있어도 괜찮은 것이냐고 물어왔다. 그건 평소에 내가 다른 도검들에게 물어보고 싶던 말이다. 괜찮다고 달래는 데는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사실 따뜻한 차와, 같이 먹을 과자를 바로 내왔다면 금방 울음을 그쳤을 텐데.
-미카즈키는 이전 혼마루의 일을 잘 말하지 않기에 언제나처럼 부실한 서류로 대충 짐작했다. 짐작컨대 그 혼마루의 사니와는 미카즈키를 그릇으로 자기가 초래한 재앙을 한 곳에 모아 타타리가미를 만들고 저주로 구속해 사역하려고 한 것 같다. 비인도적인 데다 바보같은 짓이다. 실패로 끝난 뒤엔 미카즈키는 자신이 사니와에게 받은 저주에 더해, 몸에 묶어두고 있던 재앙까지 저주로 작용해서 우리 혼마루에 왔을 때처럼 되어 있었던 거 같다. 처음 건네받은 미카즈키를 기억한다. 눈구멍이 비어있고, 귀에 납이 채워져 있고 입이 꿰매져 있던 가장 아름다운 천하오검의 모습을.
-대부분의 경우, 나의 사소한 두려움보다는 그들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더 먼저 고개를 들고 울음을 터뜨린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에게는 아직 6년전과 비교해 변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도검들은 새로 들어온 식구에게 바로 다가가지는 않는다. 해당 도검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이 있는 남사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기억이 진정될 때까지 심호흡을 하고 거리를 두고, 그렇지 않은 남사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간다. 고슴도치들을 모아놓은 큰 사육장과도 같다. 다만 미카즈키는 그런 경계심도 안좋은 기억도 없는지 누구를 보더라도 웃으면서 바로 다가간다, 거리를 두면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나는 미카즈키가 혼마루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시작한지 이틀째 조용히 미카즈키를 불러서 코코아랑 쿠키를 먹이면서 내가 당신을 피한 것은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라고 해명해야 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이었지만 미카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이 갈색 차는 무엇인고? 하고도 물어봤다. 제법 맘에 든 모양이니 다음엔 코코아에 마시멜로를 넣어 줘야겠다.
-미카즈키는 살아있는 것에 닿는 것을 정말로 좋아한다. 아니, 도검남사의 본분적인 의미가 아니라 평범한 애호의 의미다. 현현하고 여기에 오기 전까지 봤던 것이라고는 죽은 것과 썩은 것, 움직이지 않게 된 것 뿐이라 하니 이해는 간다. 하지만 흐뭇하게 혼자 있는 오오쿠리카라를 자꾸 건드려서 나한테 민원이 들어오게 하는 일만은 삼가줬으면 한다. 곤란해하는 나를 보고 하세베가 어차피 주군은 하는 일도 없고 시간보내는 방법도 잘 모르는 잉여인력이니 미카즈키를 돌봐주는건 어떠냐고 말했다. '사니와에게 해서는 안되는 일' 리스트를 빨리 만들어서 공표하고야 말 것이다.
-업무 외적인 물건에 지출이 너무 많다고 콘노스케가 한 마디 했다. 식비로 퉁치라고 대응했다. 간식도 분명 식비에 포함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항변하자 영 떨떠름한 기색의 콘노스케에게 네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는 내가 화과자를 사서 미카즈키에게 주었기에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더니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저 속물 여우. 그렇게 말하고 콘노스케가 사라지자마자 복슬복슬이는 어디 갔느냐고 미카즈키가 두리번거리며 들어왔다. 애완동물을 길러도 좋은지 문의해볼까.
-나는 살이 찐게 아니라 그냥 군것질을 하면서 5년간 잃어버린 몸무게를 조금 되찾았을 뿐이다. 군것질은 도검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수단이지, 내가 즐기기 위한 것이...아주 아닌 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주 목적은 아니다. 그런데도 다들 너무하다. 하치스카가 코테츠의 주인으로서 품격을 가져주면 안 되겠느냐고 조곤조곤하게 설교를 하고 우라시마가 옆에서 같이 운동해줄 테니까 살 빼자고 천진하게 웃고 있는게 조금 상처다. 그렇게 쪘나. 그 와중에 주인은 체질이 그 모양이니까 의외로 근육도 잘 붙는거 아닐까 하며 뭘 생각하는지 눈을 빛내는 카슈가 무섭다. 그런데 같이 군것질한 녀석들은 왜 살이 안 찌는 거지. 조금 더 포동해진 카슈나 츠루마루나 오오쿠리카라도 괜찮지 않을까. 나도 마주 놀려줄 수 있는데.
-혼마루는 매일 조용하다. 정해진 일과를 매일 반복하고 있다. 정상적인 혼마루라면 이게 맞지 않을까. 출진을 나가는 남사들은 천천히 연도를 올리고 있고, 원정을 나간 남사들은 선물이라고 자원을 가지고 돌아온다. 나는 혼마루에 남아있는 다른 도검들이랑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나씩 해보고 있다. 며칠 전엔 남아있던 카슈와 우라시마랑 같이 만두를 만들어서 돌아온 녀석들이랑 저녁에 같이 쪄먹었다.
-미카즈키의 상태와 호전과정을 상세히 적어 보고하라는 상부 명령이다. 블랙 혼마루에 희생된 다른 남사들의 케이스에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하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겠지...호전과정을 쓸 때는 머뭇거렸다. 미카즈키는 아직 완전히 호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당에 쪼그려앉아 줄지어 기어가는 개미를 바라보던 미카즈키가 손을 뻗는 순간 개미들이 그대로 죽어버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많이 약화된 저주지만 아직도 매우 작은 생물에게는 유효하다. 미카즈키가 콘노스케를 자꾸 만져보는 것은 자신이 만져도 죽지 않는 생물에 대한 기쁨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뭐 콘노스케는 생물이 아니지만. 지금 상태로는 콘노스케 정도 크기의 생물에게는 그냥 조금 몸상태가 안좋아지는 정도로밖에 적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처음에 애완동물을 안겨주려고 한 시도는 그래서 그만두고 대신 말에게 건초를 주는 일을 전담시켰다. 나중에 내가 몰래 가서 말을 돌봐주면 되니까. 다른 도검들은 딱히 아무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무서워하거나 할 줄 알았는데. 우라시마가 그거 엄청 유용한 능력 아니야? 여름 되면 불빛에 벌레도 많이 꼬이는데, 할아버지가 옆에 있으면 벌레도 다 잡을 수 있겠네? 모기도 안 물리고? 좋잖아! 하면서 반가워하고 있다. 미카즈키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지 난처하게 웃고 있었다. 여름으로 계절을 바꿀 생각은 없긴 한데.
-한 1년 전쯤부터 깨닫게 된 건데, 영력을 지나치게 쓰면 반동으로 차오르는게 느려진다. 그때면 다른 사람들처럼 상처를 입어도 자연적으로 낫지 않는 몸이 되고 가끔은 다 나았을 터인 매우 오래된 상처가 터지기도 한다. 이것은 혹시라도 오해를 받을까봐 다른 도검들에게도 말해둔 사실이다. 그래도 모처럼 다들 모여서 전골을 먹는 자리에서 그렇게 된 건 미안했다. 그래서 숨기고 내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바깥 출입을 금지당해서 지루하다. 아니, 툭 건드리면 죽을 중환자도 아닌데 복도 밖으로도 못 나가는건 너무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동안 남은 서류를 작성했다. 이때다 싶어서 평소에 못 적었던 간식을 잔뜩 적어서 하세베에게 내밀었다. 평소라면 하세베의 손에서 무참하게 저지당했을 요구가 웬일로 받아들여진 건 배에 둘둘 두르고 있는 붕대 덕분일 것이다. 만세. 간식은 나 때문에 이리 된 것이냐고 눈물을 그렁거리며 문병와서 앉아있던 미카즈키에게 대부분 건네주었다.
-도검들이 문 바깥에 모여 웅성거리길래 할 말이 있으면 들어오라고 하자 카슈가 혼자 들어왔다. 나머지 도검들은 밖에 서있었다. 카슈가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혼마루의 사니와로서 지켜야 할 규칙' 이라는 글자가 맨 윗줄에 이쁘게 정자로 쓰여 있었다. 이런건 내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비겁하게! 내용은 평범하다. 영력을 계획없이 사채처럼 끌어쓰지 말 것/편식하지 말 것/몸을 아끼고 날붙이를 몸에 대지 않을 것/목을 매달지 말 것/하루에 8시간씩 잘 것 등등 갈수록 뭘 원하는 거냐 싶은 내용들이었는데 안 지킬시 자기들이 자진해 도해실로 들어가겠다는 소리에 식겁해선 결국 지장을 찍었다.
-몸 상태는 안정됐다. 이제는 별로 아프지 않고 묵은 상처가 터지지도 않는다. 영력도 안정화돼서 웬만큼 다쳐도 금방 나을 수 있을 것이다. 한번쯤 깊게 찔러 시험해보는게 마음 편한데 그럴려다가 하치스카에게 딱 걸려서 또 벌을 섰다. 아, 남사들이 내놓았던 사니와가 지켜야 할 규칙은 한번 어기면 그날 간식이 없고, 세번 어기면 자유로운 일상이 없다. 기껏 아이스크림까지 사다 놓았더니 내 몫이 없는게 슬픈 일이다. 그것도 억울한데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두고 우라시마랑 하치스카는 여유롭게 초콜릿 맛이 더 맛있는가, 바닐라 맛이 더 맛있는가에 대한 유유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나쁜 녀석들, 나중에 혼자 현세로 돌아가면 파르페를 먹으러 갈 것이다.
-그러고 보니 주인, 이름을 불러도 좋겠는가? 지나가는 말처럼 츠루마루가 가볍게 말했다. 카슈에게도 가르쳐준 사니와명이니 딱히 츠루마루에게 가르쳐주지 못할 것은 없었다. 이름을 말해주자 츠루마루는 몇번 정도 이름을 반복해서 불러보더니 살짝 미간을 좁혔다. 어울리지도 않는 거창한 이름인데 줄여불러 보는 것은 어떠하냐고 웃는데 그러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을까 하고 정말로 무심하게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부드러운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렇게만 부르지 않으면 상관없지.
뭐라고 부를 건데, 그래서?
짧게 이렇게 부르면 어떠하느냐. 렌이라고.
언제나 그렇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은 바람을 무시하고 다가온다. 나를 그렇게 부르던 목소리가 딱 하나 있었다. 순간 울컥하는 것을 참았다. 눈물도, 오열도, 아직 버리지 못한 마음도. 겨우 울지 않고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미안. 그건 안돼. 다른 식으로 불러도 좋으니까, 그건.그 말에 츠루마루는 그답지 않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라도, 너를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그때는 그 마음에 들어가도 좋다는 뜻이겠지. 그 전까지는 네 뜻을 따르마.
-연못을 새로 단장했다. 대부분은 비단잉어를 풀어놓는 것에 불만이 없어 보였지만, 카슈와 츠루마루는 뚱하게 새로 단장한 연못을 보다가 각자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연꽃을 보고 기억해내는 것이 싫으니까 뽑아버렸는데, 둘다 알기 쉽고 곤란하게 화를 내는 타입이다.
-정기검진일이다. 현세에 나가야 한다. 언제나 절찬리에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녀석을 데려가는게 좋겠다 생각했다가 카슈랑 싸우는 시시오를 발견했다. 오늘은 저 녀석이다.
-본체를 내가 맡아두지 않았다면 인명사고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시시오를 달래주느라 햄버거를 사 먹였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패스트푸드 점이라면 딱히 고기를 먹을 필요가 없어서 나도 편하다. 아, 시시오의 상태는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다. 그냥 나 한정으로 조금 유해졌을 뿐이다. 그 병적인 호전성이 어서 나았으면. 아, 나는 멀쩡하다, 아마도. 몸상태는 양호하다. 정신상태는 프라이버시이므로 말하지 않겠다. 영력의 상태에 대해서는 가벼운 상담 후 재측정결과를 통보해주겠다고 했다.
-이 혼마루에 와서 중상을 입은 남사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케비이시가 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출진장소도 제대로 체크하지 않은 내 잘못이다. 하세베를 수리실에 밀어넣은 뒤 경위서를 따로 작성했다. 반성회에서 내일부터는 직접 출진과 원정을 맡아 지시하겠다고 했다가 칭찬받았다. 카슈가 드디어 주인이 일을 하네, 하면서 기특하다는 듯 앉아있던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오오쿠리카라도 왠지 미지근한 눈빛을 보내고 있다. 잠깐만, 난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 혼마루에 와서 언제나 열심히 일하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만. 이놈들이 정말.
-혼자서 못 자서 카슈가 몇번이고 옆에서 같이 누워주곤 했는데 그게 언제부턴가 해괴망측한 로테이션으로 바뀌어 있다. 물론 끼고 싶지 않아하는 애들은 같이 누워서 자진 않지만 대신 불침번을 선다. 이건 이것대로 고통스럽다. 혼자서 좀 편하게 자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생각을 바꿨다. 그 날은 미카즈키랑 같이 잔 날이었다. 목이 말라 눈을 떴는데 고통스러운 얼굴로 눈을 감은채 움직이지도 못하는 미카즈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당황해서 손을 잡고 천천히 영력을 불어넣자 조금씩 얼굴이 편안해진다. 다시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는, 아직 상처가 덜 가신 검. 그냥 조금 불편해도 같이 아픔을 나누는게 좋겠지.
-한 삼일 정도 시도해서 날씨를 늦봄쯤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좀 덥지만, 여름 비스무레한 것 기분을 내보고 싶었다. 불평불만은 수박과 참외, 복숭아로 잠재웠다.